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영등 Dec 07. 2022

Book 오디세이아

Book 오디세이아


 2004년 여름, 이미 나는 졸업했지만 직업 없이 결핵 약을 먹으며 집과 도서관을 맴돌았다. 발길은 무거웠고, 스스로 처지를 받아 안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인석이가 만나자고 한다. 껑충한 키에 마음 여린 인석이는 기간제 교사를 하며 임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골목 깊숙이, 이제는 빛바랜 간판에 빈자리가 즐비한 ‘학사주점’ 구석에 자리를 잡고, 노란 전구 아래 말없이 잔을 주고받았다. 불콰한 얼굴로 어둑해진 명륜동 길을 걸어 로스쿨이 바라보이는 언덕까지 올랐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법대가 모두를 내려다보는 데로 새로 지어 옮겨졌다. 법은 아래로 임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야 하는 거라며 인석이는 끝말을 흐려 혼자 읊조렸다. 그러곤 어깨에 멘 가방을 뒤적이더니 책 한권을 내게 건넸다. ‘김남주 평전’ 총구에서 나온 권력에 펜을 들어 온 몸으로 맞섰던 한 시인의 이야기다.     

 

 맑은 유리병에 꾹꾹 눌러쓴 쪽지를 담아 마개를 단단히 하고 흐르는 강물에 던지며, 누군가 그 병을 주워 기적같이 회신해주길 바라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른이 된 그 아이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려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지중해를 표류하며 겪은 이야기가 한 묶음이 되었듯, 난 책 한권을 사람 사는 세상에 띄워 그 책이 사람과 사람의 손을 타고 마음과 마음을 잇고 이어, 큰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인석이에게 지금 책을 주는 그 마음과 이름을 텅 빈 첫 장 지면에 남겨 달라 부탁했다. 나 역시 첫 장을 열어 마지막 장을 닫고, 그때의 감상과 이름 한 줄을 적어 다른 누군가에게 책을 넘기리라했다.       


 열 두해가 지났다. 책의 항해는 잘 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있을까? 빼곡히 들어 찬 쪽글과 서명, 읽는 이들의 눈물과 손때, 커피 흘린 흔적, 그어진 색색의 밑줄과 낙서, 접혀 눌려진 자국과 함께 낡아가고 있으리라. 행여 암초에 걸린 배처럼 누군가의 서가 한 구석에 잊혀 먼지를 타고 있을지라도, 폭풍에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듯 쓰레기 더미 사이에 내동댕이쳐졌을지라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인연이 다한 것일 뿐. 


 너와 나, 책을 받아 넘긴 모두는 시간을 달리하여 책이라는 배를 타고 내린 승객이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지만 지혜를 나누며 한 호흡이 되어, 삶의 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파도가 잇대어 일어나 물결로서 하나이듯, 삶의 순간과 순간이 그리고 그 삶이 빚어낸 이야기와 이야기가 책이라는 고리로 이어져,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다.      


 인석이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난 원불교에 귀의했다. 세월이 더 흘러 마법처럼 그 책이 돌아와 슬픈 내 옛 청춘을 재회한다면 여백에 한줄 더 보태고 싶다. 고맙다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찬바람 불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