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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06. 2022

나는 달린다

나는 달린다


 몸은 기억 한다. 저문 가을 단풍 길에 바람이 서늘하면 나는 달리고 싶다. 

 2002년 시월 스무날 이른 아침. 광화문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춘천 가는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물다섯의 나를 42.195km 길 위에 놓아, 담대하게 거침없이 몸과 마음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나는 나를 믿었다.      


 춘천종합운동장에 내려 땀과 열이 잘 배출되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발목과 무릎으로 오는 충격을 줄일 신은 적당히 길들여져 발에 잘 맞았다. 아침이라 굳어있는 관절을 맨손 체조로 풀고 나서, 가볍고 빠르게 주변을 걸으며 몸을 데웠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로 장거리 달리는데 필요한 글리코겐이 근육에 충분했고, 또 평소 경기 시간에 맞춰 훈련을 했으므로 몸은 완벽하게 조율되었다. 덥지 않은 약간 흐린 날씨에 바람마저 불어주니 더할 나위 없다. 


 출발선에 서서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운 뒤, 턱을 살짝 당기고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마라톤에서 낙오하지 않는 비결은 결승선에 이르기까지 숨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있다. 들이쉴 때 챙기고 내쉴 때는 그대로 둔다. 


 ‘탕’ 소리에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반시간쯤 지나자 몸이 편안하게 달아오르며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에 도달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에 앉은 듯 몸이 가뿐하다. 풍경과 하나 된 마음은 여유롭고 머리는 맑았다. 탄력 붙은 다리가 이끄는 데로 속도를 올리다가 오버페이스over pace라는 걸 늦지 않게 알아챘다. 아직 갈 길이 멀기에 기록에 욕심내선 안 될 일이다. 다시 호흡에 집중한다. 


 의암호 둘레로 붉게 물든 비경, 길게 늘어서 응원하는 시민들, 그리고 나... 지난날의 도전과 실패, 절망, 아쉬움, 후회... 날 떠난 이, 내가 등진 사람들, 상처, 원망, 미련... 불안한 앞날... 마음이 해이해지는 틈을 비집고 밀려오는 기억과, 그에 묻어나는 못다 태운 감정의 찌꺼기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붙여, 발 디딜 적마다 날려버린다.    


 중간지점까지는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별 무리 없었다. 석 달 동안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주말마다 연습했고, 새해 첫날 한겨레신문 하프마라톤 경험도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30km 지점을 지나면서 코와 입으로 드나드는 숨결이 거칠어졌다. 손등으로 얼굴을 훔칠 때, 햇살에 말라붙은 땀이 소금가루가 되어 밀려나왔다. 쉬어갈 수 없었다. 걷더라도 쉼 없이 움직여야지, 멈췄다가는 다시 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멀리 종착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움직임이 둔해져 좀처럼 스피드를 낼 수 없었다. 하얗게 아무생각 없는 마음에, 해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홀로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정신을 지탱해 준건 매일 운동일기를 써가며 단련한 근육이다. 특히 탄탄한 복근이 아니었다면 35km 언저리에서 척추가 앞으로 굽어짐과 동시에 호흡이 무너지면서 낙오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악으로만은 안 된다. 정신력은 체력과 맞물려야 쓸모 있다.  


 드디어 종합운동장 육상트랙에 올라섰다. 기다리던 이들의 함성과 사진사들의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마지막 기세를 올려 온 힘으로 질주해 결승점을 통과했다. 잔디에 엎어져 가쁜 숨을 몰아셨다. 의외로 담담하다. 3시간 27분 18초.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을 완주해냈다.     

 

 그 시절 몸과 마음에 새겨진 결은, 앉아 선禪하는 내게 그대로 이어졌다. 술 담배 없는 절제된 식단, 편안한 복장, 몸 풀기, 곧게 세운 허리, 고른 호흡, 집중, 욕심 내려놓기, 잡념 바라보기, 자신감, 굳센 의지, 몸과 마음의 균형,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꾸준한 실천 등은 하나의 이치로, 움직임動 위주의 마라톤과 멈춤靜을 주로 하는 좌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럼에도 차이를 찾자면 서원誓願. 부처되어 온 누리를 은혜로 물들이자는 큰 욕심 하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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