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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06. 2022

흰 구름 걷히면

흰 구름 걷히면


 전철 7호선에 올라 허드슨강을 지날 때면, 가끔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동후에게서 J가 맨해튼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키에 눈이 선한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에서였다. 그리고 창업동아리 SIBA 신입생 맞이 행사에서 뜻밖에 그녀를 다시 만났다. 아버지가 서울 시경 정보과장이라는 소개에 학생운동 하던 몇몇은 그 자리에서 순간 움찔했다.


 당시 군복학생이던 나는 동아리 말고도 하고픈 일이 많았다. 군대 간 사이 사라져버린 학회 ‘만두滿頭’에 대한 아쉬움에, 묵어버린 전공공부도 살릴 겸 1학년 서너 명과 소모임을 꾸렸다. 고사카 슈헤이의 ‘철학사 여행’과 구라하라 고레히도의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를 기본서로 골랐다. J는 어려워하면서도 소리 없이 따라줬다.   


 오빠 누이 사이로 티격태격하면서도 J가 남긴 기억의 단편은 다정했다. 학생회관 우편함에 뜯긴 채로 남아있던, ‘산들바람’이란 애칭을 가진 남자친구의 편지를 전해준 일이며, 예쁘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잘생겼다고 에두르다, 여자에게 그게 뭐냐며 핀잔맞은 일이며, 첫 학기 1등한 J의 자축 술자리, 그리고 단짝친구 정은이...그러다 그해 가을, 내가 단과대 부학생회장에 당선되고, 또 서로 바쁘다보니 자연스레 멀어져 담담했다.      


 수업이 빈 어느 자투리 시간. 경영관 앞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저만치서 걸어오는 J를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 하는데, J는 거리를 두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지나가버렸다. 나보다 벗들이 더 당황했다. 도서관에서도 강의실에서도, 그 후로도 여러 차례 J는 도망치듯 나를 피했다. 기어이 몸져 누워버리게 된 건, K에게서 “J가 네 이름도 못 꺼내게 하더라.”는 얘기를 듣고서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나머지, 임기를 마저 못 채우고 학생회실에서 짐 싸 나오면서, 선후배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에 시름하던 때라, J가 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을, 지키지도 못할 말을 다해낼 수나 있다는 듯이 떠벌리다 달아나버린, 비겁한 나에 대한 손가락질이라 여기며 자책했다.        


 수년이 지난 어느 저녁. 인석이의 전화를 받았다. J가 미안해한다고. 스토커가 있었는데 나로 착각했다고... 그래 그랬구나. 겨우 그런 거였어. 허탈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억울하고 말 것도 없다. 알았으면 그만이다. 


 혐오, 불안, 두려움, 미움. 이 모든 게 다 사람의 일이라, 나를 스토커로 여겼던 그 오랜 시간 동안 J의 마음도 몹시 번잡하고 시달려 힘들었을 테다. 오해 풀린 마음 뒤에 미안함이 남았다지만, 나에게 분함도 원망도 없어 대지를 일 없으니, 이제 서로 마음을 쉬어가도 되겠다. 끝내 몰랐다면, 다음 생에 왠지 모르게 싫은 사람으로 다시 만나지 않았겠는가. 


 참이 드러난 자리에 미움도 아픔도 거품처럼 스러진다.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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