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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14. 2022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서른을 넘긴 나이에 가방 하나 둘러매고 전북 진안 만덕산 후박나무 숲을 가로질러 올랐다. 뉘엿거리는 해를 따라 내 그림자도 길게 늘어진다. 어른께 인사올리고 낡은 책상이 놓인 좁은 방에 여장을 풀었다. 


벽지 곳곳이 누렇게 퍼져 번졌고, 여느 시골 후미진 방에서나 날법한 퀴퀴한 냄새가 올라 풍긴다. 구석 이부자리에 앉아 지친 몸을 벽에 기대 눈을 감으니 정신이 아득했다. 


 돈도 직장도 잃어 궁지에 몰린 나를 부모님마저 남세스러워하며 몰아대니, 마주할 때 마다 오가는 건 한숨과 고성이라, 더 이상 집에 몸 두기도 마땅찮았다. 이런 내게 강원도 화천에서 군 생활을 같이한 잊었던 오랜 벗 하태은 교무님이 손을 건넸다. 만덕산에 가서 염불 좌선만 하면 돈 들이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단다. 


실적 압박과 야근으로 단련되었기에 염불 좌선 정도 하면 된다는 말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서울에서 진안으로 가며 거추장스러운 머리칼을 밀어버렸다. 그렇게 길 잃은 늙은 양은 가출家出 했다.


 이튿날 조회시간에 만덕산 식구들께 인사드리고 손님인 나는 ‘백 군’으로 불리게 된다. 그날부터, 궂은일을 도맡아하시던 ‘강 선생님’은 아침공양 마치기가 무섭게 나를 밭으로 끌어냈다. 


왕년에 원양어선을 타셨다는 ‘강 선생님’ 팔 다리에 보이는 문신자국이며 거친 부산사투리, 그리고 한 마디 잘려나간 손가락 하나를 보고서 혹시 타짜는 아니셨냐고 묻기도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를 곳에 머물며 게으른 시간을 가지리라는 바램과 달리, 꾀죄죄한 옷 걸치고 산과 밭을 누비며 나무와 돌 그리고 흙에 부대꼈다. 


 버섯 채취하고, 감자 캐고, 감 따고, 도토리와 밤을 주워 묵 쑤고, 깨 털고, 가을배추 심을 땅 갈아엎고, 장작 쪼개 가지런히 쌓고, 청소하고 불 때고 길고양이 밥 챙겨주고. 이 모든 것이 도시생활에 젖었던 내겐 어색하고 고됐다. 


우기자면 일 안하고 그늘에 누워 한갓지게 잠이나 잘 수도 있었겠지만, 손님 ‘백 군’은 홀린 듯이 얼떨결에 만덕산 일꾼이 되어버렸다. 염불 좌선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시간 맞춰 잘 나가니, 쫒아내겠다는 말 대신, 만덕산 교무님들도 금세 떠날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며 좋게 봐주셨다. 게다가 억지로 시키지도 않는 일도 하니,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하지 아니한가.     


  망각본능을 빌려 서울 일은 다 잊고 만덕산 사람이 되어가던 어느 날, 저녁공양을 마치고 승산 종사님이 “시우 오늘은 뭐했어?”물으셨다. 개구쟁이처럼 씩씩하게 그날 일을 줄줄 불어대는데, “한 게 없어야 하는디. 함이 없이 해야하는디....”하시며 승산 종사님은 아쉬워하셨다. “네?” 나의 외마디 질문에 침묵하신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승산 종사님은 법문을 마치시고 물으셨다. “시우는 앞으로 뭐할 거야?” 미국 갈 준비를 비롯해 수행자로서의 계획을 야무지게 말씀드렸다. 떠나는 길에 문 앞까지 배웅해주시며 “시우야. 제발 아무것도 하지마. 아무것도 하지마라.” 재차 간곡히 말씀하신다.      


 긴 시간이 흘러서야, ‘내’가 했거니 하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과, ‘내’가 해내야 한다는 집착이 참 마음을 해치는 도적이라는 것을, 텅 비어 일 없는 ‘나’야 말로 고요하고 두렷한 참 주인공임을 몰록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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