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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것 아닌 의학용어 Nov 02. 2022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세계의 약속

어림이를 향한 약속

요즘 푹 빠져 있는 '시간에 기대어'란 가곡을 듣다가... 문득 잊고 있던, 시간에 관한 다른 곡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엔딩곡인 '세계의 약속'이었어요. 음악을 플레이하고, 오랜만에 추억에 잠겼습니다.  


원래 '기무라 유미'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였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노래를 반드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써야 한다고 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애니 속 소피의 목소리를 맡은 '바이쇼 치에코'가 직접 불렀습니다. 멋 부리지 않고, 소박하게 불러서 더 좋았습니다. 이 노래는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노랫말이 사람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노랫말은,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인 타니카와 슌타로(1931~)가 썼어요. 그렇게 가볍지도, 또 그렇게 무겁지도 않은데... 해석이 쉽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철학적이기도 하고, 눈물나게 아름답기도 하고. 뭐랄까.... 시간을 오가는, 시간을 넘나드는 느낌이랄까요? 


일본의 현대 시인, 타니카와 슌타로 Tanikawa Shuntaro


영겁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사랑에 관한 노래, '세계의 약속'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모든 이의 가슴을 담담하고, 상냥하게, 찬찬히 어루만집니다. 일단, 오랜만에 노래를 들어보며, 가사를 읽어볼까요?




이 노래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셋이 아닌 하나입니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존재는 과거에 갇혀있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2절로 되어 있어요. 1절과 2절은 계산된 것처럼, 의미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각 절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구절은 '절망 속에 기쁨이'(첫 구절), '시간을 초월하여'(두 번째 구절), '영원히 나와 이 순간 함께함'(마지막 구절)을 표현합니다. 


1.

1, 2절의 첫 구절은, 아픔 속에서 연하게 피어나는 희망을, '세계의 약속(世界の約束, promise of the world)'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의 약속은, 우주의 원리, 혹은 절대 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1절에서는 '태초부터 시작'된, 2절에서는 결코 '끝나지 않는' 약속이라고 표현했어요. '시작'이란 말과, '끝'이란 말을 써서 영겁의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음을 표현했고,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2. 

두 번째 구절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시간으로 엮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섞어버리는 것이 이 시의 아름다움입니다.

1절: "이제 홀로 남았지만, '어제'의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오늘' 다시 반짝이고 있어"

이제는 현재이고 홀로인데,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어제의 우리가 이 순간에 반짝이고 있다. 어제, 오늘,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다른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한 문장에 동시에 위치합니다. 사실'어제의 우리(기억)'와 '오늘의 반짝임(실제)'은 완전히 모순되는 상황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모순되는, 추상적인 시간의 초월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2절: "이제 홀로지만, 내일은 끝이 없어, 네가 알려준 밤의 상냥함처럼"

여기서도 시간을 갖고 장난을 칩니다. 현재는 홀로지만, 내일은 무한해, 끝이 없어. "절망적이지만, 네가 그랬잖아? 가장 어두운 밤에 상냥함이 숨어 있다고." 이런 의미입니다. 작가는 계속, 어둠 속에 아름다운 빛나는 추억, 절망 속에 희망이, 시간을 초월하여, 즉, 현재, 과거, 미래에 존재하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3. 

세 번째 구절에선, 두 번째 구절의 시간의 초월이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1, 2절 모두 같은 후렴구, '당신은 추억 속에 있지 않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당신은 과거에 갇힌(추억 속, 思い出のうち) 존재여서 지금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현재 나와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추억 속에 영원히 있어' 이런 표현과 정반대의 의미예요. "추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있다고!!" 이렇게 소리치는 느낌이죠.

1절: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야,  바로 지금 산들바람이 되어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어."

멜로디와 함께 이 부분을 들을 때면 제 볼에 바람이 스치는 촉감이 느껴져요. 아련하게 추상이 구체적 감각이 되어 경험하는 것이죠.

2절: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야,  시냇물의 노래로, 하늘의 푸르름으로, 꽃의 향기로 내 옆에 있음을 느끼고 있어."

2절 역시, 추상적 개념이 감각을 통해 표현되며 실제 들리고, 만져지는 듯합니다. 2절의 세 번째 구절은 이 노래의 결론인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영원히 미래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노랫말을, 글쟁이도 아닌 제가, 감히 한국어로 번역해보았습니다. 정말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1절

涙の奥にゆらぐ微笑みは, 時の始めからの世界の約束

눈물 속에 어렴풋 보이는 미소는, 태초부터 시작된 세계의 약속입니다


いまは一人でも二人の昨日から, 今日は生まれきらめく, 初めて会った日のように

이제 홀로 남았지만, 어제의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오늘 다시 반짝입니다.


思い出のうちにあなたはいない, そよかぜとなって頬に触れてくる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산들바람이 되어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2절

木漏れ日の午後の別れのあとも, 決して終わらない世界の約束

우리가 이별을 한 오후에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영원한 세계의 약속입니다.


いまは一人でも明日は限りない あなたが教えてくれた, 夜にひそむやさしさ

이제 홀로 남았지만, 당신이 가르쳐준 어두운 밤의 상냥함처럼, 우리가 함께하는 내일은 끝이 없습니다.


思い出のうちにあなたはいない, せせらぎの歌にこの空の色に, 花の香りにいつまでも生きて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시냇물의 노래, 하늘의 푸르름, 꽃의 향기가 되어 내 곁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영원히...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시냇물의 노래, 하늘의 푸르름, 꽃의 향기가 되어 내 곁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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