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어 사용자로서 의학용어 공부하기
앞선 장에서 의학용어의 특징을 이해하셨나요? 의학용어는 무작정 외우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학교 다닐 때 의학 용어를 이렇게 배웠습니다. 일단 접두사와 접미사를 수십 개 외워요. 그다음엔 root를 수백 개 외워요. 그리고 시험을 치죠. 수많은 단어들을 실제 의미도 모른 채, 매주 퀴즈를 보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면서 외웠습니다. 방학이 되면, 모두 잊어버렸죠. 예전 방학 때, 영어 공부한다고 강남역에 있는 학원에서 “보캐뷸러리 1000” 듣고 영어 단어 1000개 한 달 동안 외운 거랑 비슷한 상황이에요. 외울 때는 뿌듯한데… 나중에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죠. 왜 그럴까요? 별 의미 없는 단어를 외웠기 때문이에요. 이건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처럼 무식한 일이죠. 그나마 자주 쓰는 전화번호라면 저절로 외워지겠지만, 100개쯤 몰아서 외운 전화번호는 그냥 수일 내에 기억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배워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의학 공부를 지금 막 시작했거나, 일반인으로서 제대로 의학지식을 습득하거나, 병원에서 의학 관련 일을 하면서 좀 더 깊은 소통을 하고 싶다는 상황을 가정해 볼게요.
아래 글에서 이어지니 꼭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제가 이 책의 초안을 썼을 때 영미권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도 하는데, 영어가 더 편한 그런 친구였습니다. 책을 읽고는 약간 의아에 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다 아는 거 아니냐고. 이 책에 있는 내용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어휘 리스트가 필요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한국인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너무 전문 영역이라 읽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기존 영문 의학용어 책의 문제점
원어민은 영어 단어의 어원에 대한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 보는 한자말을 봐도 대충 앞뒤 글을 보면 짐작이 되잖아요? 영미권 친구들은 로마어, 그리스어에 대한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다음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해당 최한기 선생님이 집을 사서 '양한정養閒亭'이라는 현판을 붙인 후 쓰신 글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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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는 끊임없이 움직이나 그 모습이 지극히 한가롭다. 주위의 산은 변하는 모습이 무궁무진하나, 그 모습은 한가롭기만 하다"
어때요? 저 생천 처음 보는 한자말 양한정이 한가로움에 관한 것이고, 정은 쉴 수 있는 정자를 말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교육을 잘 받은 미국인들도 hydronephrosis라는 글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드나 봅니다. 제가 일상 영어와 라틴어의 어원을 연결시켜서 의학용어를 설명하는 부분이 그들에게는 과잉된 설명처럼 느껴집니다. 기존의 영어로 된 의학용어 교재를 보면 pathy라는 접미사를 설명할 뿐, 그 pathy가 pathos에서 온 말인지, 현대 영어의 sympathy에서 쓰이고 있는지, 더 나아가서 passion과 같은 뿌리를 갖는 말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래 아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몰라요. 그래서, 좀 더 뿌리부터 설명하고, 일상용어에서 연결해나가야 해요. 일상용어 속에 오래된 라틴어 그리스어가 숨어 있거든요. 우린 그런 단어들을 이미 알고 있지만, 의학용어랑 잘 연결시키지 못해요. pathos가 pathology의 patho와 같은 단어라는 생각 안 해보셨을 거예요. 이걸 연결시키기만 하면 의학용어의 반은 저절로 외워집니다.
기존 한국 의학용어 책의 문제점
한국의 의학용어 책은 기존의 영어책에 한글 의학용어를 추가한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아무리 예쁜 그림들과 표로 쉬운 척을 해봐야, 더 어렵습니다. 왜냐? 기존의 영어 용어에 더 하여, 한글 의학용어도 더불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발성 경화증, 수신증, 죽상동맥경화증 등 이런 한글 용어를 이미 알고 계신 분이 공부를 하신다면 쉽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냥 한글 단어를 영어로 바꾸는 작업이니 까요. 그런데 이런 용어를 모르는 상태라면 어떨까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다음 단어들을 가르친다고 가정하면 외울 수 있으세요?
Eosinophils 호산구
jejuna 공장
schwannoma 신경초종
아마도 쉽게 외울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한글로 된 용어를 모르시니, 영어로 된 용어도 느낌이 오지 않으실 거예요. 결국 시험이 끝나면 잊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필요할 때면 한글 용어가 무엇인지 공부를 또 해야 해요. 이중 공부가 되는 거죠. 저는 차라리 영어의 느낌을 잘 알기 위해 영어책을 권하고 싶어요. 아래 몇가지 책을 추천해놓았습니다.
제가 의학 용어는, 아이폰이나 스파게티와 같은 새로운 물건에 대한 외래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스파게티란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처음으로 그 음식을 먹으면서 였습니다. 이 신기한 볶음면은, 먼 나라 유럽의 면 요리인 스파게티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티브이에서 짜파게티가 나왔을 때는 어떤 제품인지 예측이 가능했어요. 이미 짜장면도 알고 스파게티도 알았으니까요. 그렇죠? 단어는, 단어가 먼저가 아니고 실체가 먼저입니다. 실체를 알아야 단어를 알 수도 있고, 알 이유도 있습니다. 위의 예들에서 먼저 호산구가 무엇인지, 공장이 무엇인지, 신경초종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저 영어로 쓰인 의학 용어를 아무리 외운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곧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요.
저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의학용어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의학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의학용어를 공부할 수 있을까?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이미 알고 있는 일상용어와 어원, 뿌리를 찾아서 의학용어의 느낌을 찾아주자라는 생각입니다. 미국인이 의학용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는 그 시작 상태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음 공부가 쉬워 저요. 처음엔 시간이 걸려도 뒤에 나오는 단어들은 그 뿌리를 통해서 짐작이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인문학으로 의학용어 시작하기'라고 했습니다. 동양철학, 서양철학, 예술, 문화, 그리고 의학의 이야기들을 같이 버무려서 그 근원과 배경까지 이해를 하면 영미권 사람들처럼 단어에 '감'이 생기게 될 거예요.
둘째, 일상 영어와 의학용어를 계속 연결시켜서 공부하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안드로이드(android)라는 단어를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안드로이드에서 andro와 oid는 의학용어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말들이에요. 먼저 안드로이드가 '남자를 닮은 로봇'이란 뜻을 알면, androgen은 남성(andro~)을 만드는(gen) 물질임을, opiod는 아편(opium)을 닮은(~oid) 물질임을 유추할 수 있어요. 일상용어와 의학용어를 한 번에 잡는 방법입니다.
셋째,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의학용어만 공부하면 돼요. 내용을 모르는 단어 암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내가 운동을 하면서 근육 생리와 해부를 알고자 하면 그 부분만 공부하면 되고, 내가 당뇨가 있어서 공부를 하고 싶다면 당뇨만 공부하면 돼요. 다만, 이 때는 의학용어 외에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의학용어는 쉽지만, 의학은 어렵다고 했죠? 예,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다만, 의사들처럼 모든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는 없어요. 여러분이 의학도이거나 간호대학을 다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시작하는 단계이니 기초적인 내용만 공부하시면 됩니다. 만약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다면, 아예 단어를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의학용어를 간단한, 일반인 수준의 의학정보와 함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의학 용어는 처음 의학을 공부하면서 시작하는 수업입니다. 의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어요. 그 수업 내용은 단어를 많이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의학 용어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배경을 갖는지 아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질병이나 생리에 관한 지식은, 의학 용어에 서사를 부여합니다. 서사가 있을 때, 의학 용어는 의미를 갖게 되지요. 이순신은 명량해전,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이라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서 단어나 이름은 자연스럽게 기억나는 거죠. 서사 없는 용어는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과 같습니다. 간단한 배경지식은 의학용어를 살아 있게 만들 거예요.
넷쩨, 의학용어는 단어예요. 단어는 어떻게 공부해할까요? 문장 속에서 공부해야 해요. 단어만 따로 외우기보다 계속 의학 문서, 기사 등을 통해 공부해야 합니다. 일단 관심 주제를 정하고 쉬운 책을 보세요. 의학용어를 공부하고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을 보면서 의학용어에 익숙해지는 순서가 맞습니다. 저는 주로 3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모두 일반인을 위한 책들이고 재밌게 읽어가며, 의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책들입니다.
1. Kay's anatomy by Adam Kay
2. The body by Bill Bryson
3. YOU: The Owner's Manual by Michael F. Roizen
이 책들 외에도 구글 뉴스에서 관심 있는 분야의 의학기사를 꾸준히 읽어보시고, 그때 그때 필요한 단어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장부터는 본격적인 의학용어 수업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