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코어(vellichor) 의미: 오랜 책에서 풍기는 그리운 냄새
동네 서점과 책에 관한 추억
초등학교 시절 나는 늘 조금 비켜서 있었다.
잘 뛰지도, 웃기지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무리 속에 끼어보려 몇 번 발을 떼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는 또 구석 어딘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책이 좋아서였는지, 달리 갈 곳이 없어서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책을 볼 때만큼은, 억지로 재밌는 척할 필요도, 바보처럼 보일 위험도 없었다.
늘 학급문고에 있는 책은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 읽어 버렸고, 집에 있는 책은 읽고 또 읽었다.
어린 시절 내가 성적이라도 잘 받으면 어머니가 학교 앞 작은 서점에서 책을 사주셨다.
서점에 들어서면 '계림문고'가 있는 책장으로 달려갔다. 빼곡히 꽂힌 책들 사이에서 내 다음 친구를 고르는 일은 항상 가슴 설레는 의식이었다. 고민 끝에 고른 책은 주인아저씨가 포장지에 정성껏 싸주셨다. 표지의 그림을 자꾸 보고 싶지만, 마치 다림질을 한 듯 싸인 책 표지는 그대로 소중하고 예뻤다. 집에 돌아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책 냄새를 맡으며 조금씩 조금씩 글자를 읽는다. 무슨 일이 다음 페이지에 펼쳐질까 기대하면서.
아직도 계림문고의 연한 달걀색의 그 종이 질감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여백이 많은 두꺼운 종이의 큰 글씨의 책을 보면 좀 마뜩치 않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대형 서점이 내 의식의 장소였다.
처음 교보문고가 생겼을 때 일주일에 한 번은 135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내렸다.
그 거대한 서점에 들어서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책장이 책장을 낳고, 코너를 돌면 또 코너가 나왔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어느새 처음 왔던 곳인지 새로운 곳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 책장의 미로 속에서는 무명작가의 첫 책이 베스트셀러 옆에 조용히 꽂혀 있었다. 아무도 밀어주지 않았지만, 아무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손이 가는 책을 꺼내고, 첫 페이지를 읽다가 다시 꽂고, 옆 책을 꺼냈다. 그러다 어떤 책과 눈이 맞는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책과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 그게 정말 좋았다. 서점이 늘 설렘을 주었던 건 그 미로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참 공사를 하더니 교보문고에서 미로가 없어졌다. 입구부터 탁 트인 공간에 책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다. 이 책을 읽으세요, 이 책이 지금 화제입니다. 백화점 1층의 화장품 코너처럼 변해버린 서점엔 책장의 미로가 없었고, 우연히 마주칠 책도 없었다.
베스트셀러의 산더미에 밀려 잊고 지냈던 그 미로의 감각을, 낯선 미국의 도서관에서 다시 마주했다. 한국처럼 현대적인 분위기는 아니고, 오랜 유럽 대학의 도서관 같이 고풍스러운 도서관이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여서, 생각이 많아지거나 지칠 때면 도망치듯 그곳을 찾았다.
먼지가 빛 속에 떠다니고, 누군가의 손때가 밴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책장 사이를 걷다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 미로 속에는 어릴 적 주인아저씨가 정성껏 싸주셨던 계림문고의 달걀색 종이 질감이 있었고, 광화문 교보문고 구석에서 우연히 낯선 책과 눈이 맞았던 설렘이 겹쳐 있었다. 시간도 공간도 변했지만, 책이 만들어낸 미로는 나를 늘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주었다.
도서관은 새 책이 가득한 서점과는 또 다른 냄새를 풍긴다. 오래된 종이가 세월과 함께 천천히 삭아가며 내뿜는, 퀴퀴하면서도 묘하게 달콤한 향. 누군가 이 이름 없는 감정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두 고대어를 합쳐 단어를 만들어냈다. 바로 존 코닉(John Koenig)이 '슬픔의 위안(The Dictionary of Obscure Sorrows)'이라는 책에서 만든 벨리코어(Vellichor)다.
벨리코어(Vellichor)
책냄새, 오래된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묘한 쓸쓸함과 향수를 뜻하는 단어.
양피지를 뜻하는 라틴어 벨룸(vellum)과,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혈관을 흐르는 영액(靈液) 이코르(ichor)를 결합하여, '책에 흐르는 신성한 피'를 뜻한다. 그 낭만적이고 지적인 마력을, 이 단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학교 앞 동네 서점의 빳빳한 새 책 냄새에서 시작해 대형 서점의 잉크 냄새를 지나, 이국의 오랜 도서관이 품은 벨리코어에 이르기까지. 나는 늘 그 냄새를 이정표 삼아 낯선 세상에서 숨을 고르고, 또 기꺼이 미로를 헤매이며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그 냄새에 이끌렸나 보다. 먼 나라에서 다시 마주한 내 오랜 친구에게서는 여전히, 아련하고도 다정한 향기가 난다.
Vellichor
/ˈvel.ɪ.kɔːr/
n. 명사. 헌책방이나 오래된 서점에 들어설 때 느껴지는 특유의 묘한 분위기. 수많은 시간과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들이 종이 냄새와 함께 뿜어내는 정적이고도 아득한 향수를 뜻한다.
저 처럼 동네 서점 그리우신 분들 많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