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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Aug 24. 2020

일본인 이야기 1

전쟁과 바다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시대는 1550년대에서 1620년대에 이르는 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한 연도가 1592년이니 우리와 밀접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가수 보아가 출연해서 우리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던, 일본 연말 방송에서 전통과 인기를 자랑하는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 (こうはくうたがっせん)의 이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쟁취하기 대회전을 벌였던데서 유래했다. 대회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오사카로 대표되는 간사이 지방과 에도(도쿄)로 대표되는 간토 지방 세력이 서군과 동군으로 나누어 벌인 3일 전쟁을 일컫는다.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이와 관련된 단어를 종종 듣게 된다. 일본인이 가장 친근하고 좋아하는 위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이고 가장 싫어하는 위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조사가 있었다. 이 두 인물이 나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이다. 이 세 인물은 워낙 많이 나와 일본에 관심 있는 이라면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을 거다. 소설 대망은 우리나라에 50여 년 전 소개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다. 지금도 집 근처 도서관에 가면 쉽게 빌릴 수 있는 인기 서적이다. 이 책이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32권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오다 노부나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쟁취하고 아들에게 쇼군의 직위를 물려주기까지를 이야기한다.   

<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표지

저자의 책이 기술하고 있는 시대가 거의 이 소설의 시대와 일치한다. 소설은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고 인물의 성격을 소설가가 만들어 낸다. 저자는 섣불리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인물의 행적을 기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의 국제 정치를 다양한 창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성하려고 애썼다. 소설에서 보지 못했던 동북아시아 정세를 확인하고 한중일 세 나라가 가진 한계와 세계관을 묘사했다. 필자는 이 세 인물의 부침에 따라 저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천히 세력을 키워나갈 무렵, 아시아에 접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펑후 제도에 군사 거점을 마련하다가 명나라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서 타이완 남부에 거점을 마련했다. 네덜란드는 일본에 무력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에 난학이라는 학문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중국보다 서양과 접할 기회가 적었음에도 서양 학문을 도입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중국이 가졌던 한계를 지적하는 걸로 설명을 대신한다. 첫째, 당시 중국은 유럽 세력과 비등한 군사력을 가졌다. 둘째, 중국은 영토가 넓다 보니 광저우와 마카오를 상실해도 안보적, 경제적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셋째, 예수회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중국 민중에게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넷째, 당시 중국은 명청 왕조 교체기로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다섯째, 중국인들은 유럽으로부터 배울 게 없다 여겼다. 이에 비해 일본은 유럽의 군사적 위협을 중국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 서양 학문을 적극 받아들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 세력이 제작한 세계지도, 항해 천체 도구를 아꼈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일본 국내 통일 후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남겼다. 이 시기 일본은 황금이 넘치는 나라, 지팡구로 알려졌다. 일본이 은을 많이 산출하여 수출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일본이 아편전쟁을 겪은 중국과 달리 서양 세력과 별다른 전투를 겪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세력은 전국시대 일본의 장군들이 충분한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무기인 조총에 대한 열망이 커서 무기 거래를 통해 충분한 수익을 거둘 수 있어 굳이 일본을 정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또, 일본과 인접했던 서양 주요 세력은 선교사 세력이라 정복 전쟁의 필요가 적었다. 오히려 노부나가의 세계 정복의 꿈을 이어받은 히데요시는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부나가의 꿈을 명 정벌이라는 구실로 이용했다. 명 정벌을 위해 조선에게 길을 빌리겠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공격했다. 이에 반해 이에야스는 조선과 다시 국교를 맺고, 나아가 명과도 국교를 맺으려고 시도했다. 이에야스는 일본 밖으로 욕심을 내지 않고 자손들에게 공고화한 권력을 승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 후 도쿠가와 막부는 유럽과 통하는 문을 닫고 대양 항해가 가능한 조선술을 포기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영원히 고착시키고 사회 안정화를 위해 조총 전투 전술을 포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1565년 5월 가톨릭 신부들의 보호자였던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요시 삼인방 및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 중부 지역 영주들의 하극상에 의해 살해되는 에이로쿠의 변이 일어났다. 이후 가톨릭 세력은 새로이 패자로 대두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접근해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노부나가는 이를 기회로 기존 중화 문명 중심 세계관을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신식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1567년 9월 노부나가는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 성으로 거점을 옮기고 기후로 지명을 바꾸어 일본 통일에 대한 야망을 일본 전역에 알린다. 1568년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입경하여 일왕이 요시아키를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하게 한다. 노부나가는 1570년 1월 요시아키에게 5개 조의 문서를 제시하여 자신이 쇼군 대신에 일본을 통치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다. 1572년 다케다 신겐의 사망은 신겐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포위되었던 노부나가에게 행운이 되었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잇코잇키 세력을 학살하고 에치젠의 잇코잇키 세력을 불태워 죽이는, 저항 세력을 철저히 학살하여 후환을 없애는 모습을 보였다. 히데요시가 이 전략을 이어받아 조선과 명나라 사람을 임진왜란에서 대량 학살하였다. 1578년 3월 노부나가를 위험에 빠뜨렸던 우에스기 겐신이 갑자기 사망하여 노부나가가 위험을 벗어나게 되었다. 1582년 노부나가에게 더 이상 행운이 작용하지 않았다. 혼노지에서 심복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노부나가는 위험에 빠지고 할복으로 생을 마감한다. 노부나가는 일본 드라마에서 굉장히 거칠고 잔인한, 괴상한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존재하여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수순을 밟아갔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여러 NHK 대하드라마에 묘사된 노부나가의 최후는 장렬한 무사의 모습이었다. 필자가 그 장면마다 느낀 정서는, 일본인들이 가지는 노부나가의 장렬한 최후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히데요시가 크게 평가를 받는 이유는 노부나가의 죽음이 알려진 뒤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신속한 군사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1582년 6월 3일 모리 세력과 전투 중이었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모리 측과 화해하였다. 다카마쓰성의 영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이끌고 마카마쓰성을 차지한다. 히데요시는 6일 낮까지 모리 측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그날 저녁부터 퇴각하여 7일 히메지성에 도착한다. 히데요시 군은 13일 야마자키에서 두 시간이 안 되는 전투로 아케치 미쓰히데 군을 패퇴시키고 아케치는 농민 공격을 받고 할복한다. 히데요시는 25일 회의를 주의를 열고 노부나가의 세 살짜리 맏손자 산포시를 차기 가주로 결정한다. 히데요시는 산포시 후견인으로서 행사하며,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수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기 여동생을 이혼시켜 이에야스와 결혼시켰으나 이에야스가 굴하지 않자 자신의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 결국 이에야스를 신하로 두었다.  히데요시는 인간이 가지는 권력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그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돌파구를 찾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히데요시는 군사를 조선으로 출병하기 전 가톨릭 영주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가톨릭 다이묘들로만 구성된 부대들을 만들었다. 이 시기는 히데요시가 가톨릭을 탄압하기 전이었으며 가톨릭 세력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587년 6월 10일을 기점으로 가톨릭 신부 추방령을 발표하고 가톨릭 세력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와 달리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보다 내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서구 세력처럼 식민 통치를 통해 제국을 만들어가지 않는, 쇄국의 길로 가는, 일본 역사에서 분기점을 만들었다고 평한다.      

히데요시는 1592년 조선을 침공을 명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16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고 올라간다. 이즈음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는 게 힘들다는 점을 인식하고 현지 지배의 안정화를 명했다. 1593년에 히데요시 본인이 조선으로 건네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히데요시는 일본 국내에서 자신의 후계 구도를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 자신의 양아들 히데쓰구 일가족을 모두 몰살시켰다. 자신의 갓난 아들 히데요리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히데요시 본인이 히데요리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살아있을 거라 예상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더 이상 행운은 허락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사후 히데요시의 측실 치치와 아들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와 일본 통치권을 둔 싸움을 시작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야스는 초기에 상업적 이익을 위해 가톨릭 세력이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허용해야 한다고 여겼으나 이 세력이 계속 커지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같이 가톨릭을 탄압하지는 않지만 우대하지도 않으며 가톨릭 국가와 관계를 가능한 온건하게 이어가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정한 영주들 사이에 사사로이 혼인 관계를 맺지 말라는 방침을 깨고 1599년 다테, 후쿠시마, 하치스카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는다. 이로 히데요리를 옹호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최고 권력을 놓고 최후의 일전을 벌일 준비를 마치게 된 거다. 드디어 1600년 9월 15일 일본을 서부와 동부로 가르는 중간 지점인 세키가하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전투를 벌인다. 이에야스는 형식상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모반한 다이묘인 이시다 미쓰나리를 진압한다. 이에야스는 1615년까지 외견상 도미토요가의 신하였다. 1609년은 도쿠가와 막부가 대외 관계를 이전 시대와 다르게 재조정한 해였다. 첫째, 조선과 기유약조를 통해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국교를 재개했다. 둘째, 네덜란드 상관을 히라도에 설치했다. 셋째, 가톨릭 다이묘인 아리마 하루누부에게 타이완과 무역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했다.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와 영국 외에도 포르투갈 및 스페인과의 무역 관계를 계속할 의사를 가졌다. 하지만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 신자들 간의 유착관계를 국가 불안 요소로 간주하고 가톨릭 금교령을 발표한다.      

이에야스는 생을 마감하기 전, 자신이 세운 권력을 공고히 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을 시켜 호코지 절의 종명을 왜곡해 히데요리와 전쟁을 만들 구실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주초위왕을 만든 거다. 이에야스는 나아가 히데요시가 일본을 관리하다가 히데요리가 자란 뒤 권력을 남기라는 유언을 애초부터 히데요시가 자신에게 권력을 승계했다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에야스 군은 1615년 5월 6일 오사카 여름 전투를 시작하여 8일 만에 오사카성을 함락하고 도요토미가를 제거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만발의 준비 끝에, 마침내 전국시대를 완전히 끝내고  권력을 손에 쥐고 후손들에게 일본을 물려주고 1616년 4월 17일 사망한다.      

1623년 7월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 이에미쓰가 쇼군 3대를 계승하고 영국이 히라도에서 철수하면서 에도시대의 국내외 질서를 확립한다. 막부는 가톨릭 탄압을 통해 체제 안정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 스페인과 관계를 아예 단절하고 국내 가톨릭 신자를 말살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영국, 네덜란드를 새로운 무역 파트너로 선택, 저울질하다가 최종 네덜란드를 무역 상대국으로 결정한다. 쓰시마를 통해 조선과, 나가사키를 통해 유럽 및 청나라와, 사쓰마를 통해 류큐왕국과, 홋카이도 마쓰에마를 통해 아이누 및 북방 민족들과 활발한 교섭을 가졌다. 우리는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쇄국 정책을 쓰다가 쿠로이후네(흑선)에 강제 개항했다고 배웠지만 저자는 이 주장이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필자도 동의한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서양과 외교관계를 통해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서구 세력이 낯설지 않았기에 적극 개항 후 팽창할 기회를 가진 게 아닐까 싶다. 근대 일본이 형성되기 전,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국제 외교 방침을 세웠던 도쿠가와 막부는 이후로 200여 년 정도 존속했다. 이 시간 동안  국제 세력, 대항해 시대에 해양 세력을 외부로 적극 투사시켰던 서구와 접촉했던 일본은 조선보다 좋은 기회를 가졌다. 청은 외부세력에 관심이 없다가 아편 전쟁을 겪고 영토를 상실했다. 반면에 조선은 위기도 기회도 가지지 않았다.      


 17~19세기 청과 조선과 달리 일본에 다양한 사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은 획일적인 교육을 지향하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경제 상황이 양호했기 때문이다. 국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권력과 명예를 얻는 시스템이 없었던 일본 사람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물론 일본인들은 당연히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이 한계에 대한 궁금함과 이 시대 청과 조선이 가졌던 국제 환경을 알고 싶음이 저자의 다음 책을 기다리게 만든다.     


본사와 제휴한 외부 필자에 의해 서평이 작성되었습니다. 서평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본사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필자 : Nebul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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