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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Sep 28. 2020

국체론

천황제 속에 담긴 일본의 허구

 우리는 일본왕, 천황을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천황이라고 말하기 싫은 사람은 일왕이라고 표현하나 주로 천황이라고 부른다. 우리 정부도 공식적으로 천황이라고 표기한다. 천황은 1998년 9월 11일 박지원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을 공식 발표하면서 상대국 호칭 그대로 불러주는 게 국제 외교의 관례라며 천황이라는 표현을 썼다. 박대변인은 앞으로 한국 정부가 천황이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작년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하며 천황이라고 언급한 건 이의 연장선이었다. 

우리에게 천황은 편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강요당하며 겪은 어려움은 잊지 못할 과거의 아픔이다. 현재 일본에서 천황은 어떤  존재일까? 일본의 신년 풍경 중 하나는 일본인들이 천황을 만나려고 황궁으로 가는 행렬을 이루고 천황은 하루 5번의 만남을 10만여 명의 국민들에게만 허용하는 모습이다. 황궁 방탄유리 앞에 천황 부부와 두 아들 내외가 손을 흔들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5분간을 위해 수많은 일본인은 몇 시간을 줄 서서 기다리며 손가방을 제외한 모든 가방은 검색대에 강제 보관되며 탐지기로 몸수색이 끝난 사람만이 황궁 입장이 허용된다. 

천황은 일본에서 살아있는 신이라고 일컬어지며 추앙받는다. 형식적으로 일본 총리는 천황이 임명한다. 천황에게 정치적 실권은 존재하지 않지만 영향력은 매우 크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은 쇼군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유지시킨 정치 장치였다. 막부가 전면에 나서 일본을 통치 하지만 정치적 책임을 지기 싫은 경우 천황이 정치적 책임을 졌다.  도쿠가와 막부가 힘을 잃고 역사 속에서 퇴장하며 천황이 전면에 등장한다.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천황의 영향을 일본인들의 일상으로 침투시켰다. 이 즈음의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혁혁한 명성을 얻고 있는 근대주의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 사회의 봉건성과 불합리성을 통렬하게 파헤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국체론(國體論)> 표지

    

국체(國體)란 무엇인가? 나라의 통치 체제, 즉 천황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치 체제 또는 천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한편으로 천황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경우가 이를 반영한 경우이다. 이 국체가 일본 고대로부터 기인한 게 아니라 불과 150여 년 밖에 되지 않는 근대 일본의 정치 체제이다.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몇 년 전 있었다. 

아키히토 前 일본 천황(오른쪽), 출처 : 연합뉴스


2016년 아키히토 천황의 생전 퇴위 발표를 아베를 비롯한 보수계 전문가들이 비판했다. 이들은 2011년 후쿠지마 원전사고 이후 천황이 제기한 민주체제 위기에 대해 ‘천황은 아베 정권의 개헌을 방해하지 말라’고 발표했다. 국체가 신성불가침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편리한 수단임을 보여준 사례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아키히토 천황은 양위를 발표하는 중 ‘천황의 고령화에 따르는 대처 방안이 국사 행위나 그 상징으로서의 행위를 한없이 축소한다면 무리가 생길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천황이 움직이고 국민과의 교류를 심화시키면서 그 바탕 위에서 기도를 실행해야만 비로소 천황이 지난 상징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도의 차원에서 천황은 국민의 행복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있으며 일본 국민의 행복, 불행이 천황의 기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아키히토 천황은 천황 직무의 본질은 공동체의 영적 일체성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있음을 시인하고 전후 민주주의 위기, 상징 천황제의 위기가 심화되었다는 절박감을 표출한 것이다. 맥아더가 만들어 놓은 전후 일본 체제는 대미 종속 구조 아래 근대 천황제에서 군국주의를 빼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주입한 상징 천황제이다. 결국, 아키히토 천황의 발화는 천황을 국체로 하는 전후 미국 주도하의 일본의 정치체제를 안온하게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자 천황의 역할의 한계를 노출한 증거이다.     

메이지 시대의 천황은 명확한 지위를 가졌을까? 메이지 헌법에는 천황의 지위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메이지 헌법에는 천황은 신성 황제와 입헌군주를 규정하고 있다.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4조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 하고, 이 헌법 조규에 의거하여 그것을 행한다.


제1조는 만세일계의 신권정치적 이념을 제4조는 입헌군주제의 이념을 규정한다. 여기서 통치권을 총람 한다에 주목하자. 이 의미는 법학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행위를 구체적 차원에서 결정하고 담당하는 것은 천황의 보필자이고 원수인 천황은 이를 재가하는 형식적인 행위를 하는데 그친다는 의미이다. 이 천황의 지위 부여는 메이지 헌법 제3조 천황은 신성해서 침해해선 안된다와 관련 있다. 이 부분은 군주무답책, 즉 국가가 잘못을 범하더라도 천황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대신이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나아가 정통성을 갖춘 권력의 원천은 천황에게만 있고 국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전전 정치체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국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들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형태를 취했다. 1910년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26명을 메이지 천황 암살 계획 혐의로 체포 기소하고 비공개 재판으로 24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국체의 적이었다.      

포츠담 선언 수락 때, 일본의 유일한 항복조건은 국체호지(견지)였다. 1945년 8월 14일 어전회의가 소집되었다. 천황은 국체호지에 문제없다는 예측을 하고 결단을 내렸다. 그날 밤 천황은 포츠담 선언 수락을 연합국에 통지했다. 그 사이에 비밀리에 준비해두었던 종전 조서를 녹음 방송으로 옥음 한 뒤, 15일에 방송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지도부는 국체 개념을 객관화하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전쟁 지도부는 국체를 천황이 가진 국가 통치의 대권으로 공식 번역하여 포츠담 선언에 이 국체를 변경하는 의미가 담긴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연합국에 타진했다. 결국 국체호지는 옥음 방송에서 ‘짐은 이에 국체를 호지할 수 있고’라는 형태로 분명하게 선언되었다. 일본인의 주관적 인식으로는 국체는 호지됐지만, 객관적 차원에서는 국체가 변경됐다는 기묘한 환상이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미국의 일본이라는 구조는 성립하여 계속 이어지게 된다. 미 군정기를 넘어서도 이어진 이 구조는 일본의 자발적인 주권 포기를 대가로 한다. 일본은 주권 포기로 얻는 건 무엇인가? 국체는 호지됐다는 의제다.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들의 일본의 군주제를 폐절하라는 요구로부터 천황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천황을 지켜내어 새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새 헌법은 메이지 헌법에서 정한 헌법 개정 절차에 따라 개정됐다. 메이지 헌법 제73조 ‘칙명으로써 의안을 제국의회의 논의에 부친다’에 의해 메이지 헌법을 변경할 수 있는 이는 천황뿐이었기 때문에  쇼와 천황이 새 헌법 초안을 발의하고 최종 재가해서 메이지 헌법을 새 헌법으로 개정했다.       

쇼와 천황은 새 헌법하에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 구 헌법 하에서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인식했던 걸로 보인다. 천황은 요소요소에서 적절한 조언이나 격려, 경고를 위정자에게 주는 것이 천황 대권이 폐지된 새 헌법하에서의 역할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걸로 추측된다. 천황 자신의 의향을 넌지시 이야기함으로써 통치 엘리트 집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해줌으로써 천황의 근본적 역할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맥아더의 미군정은 천황을 통한 원활한 점령 통치와 천황제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일본에 주입시켰다.      

전후 일본의 대미 종속 레짐(통치)에 대한 가장 큰 내발적인 저항은 1960년의 안보 투쟁이었다. 미일 지배층은 이 투쟁을 극복함으로써 전후 대미 종속 레짐을 확고히 했다. 이시바시 단잔과 같이 전후 일본이 나아갈 방향을 여러 가지로 모색하는 인물은 미국 입장에서는 위험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안보조약 개정에 대한 혐오를 가진, 일본인에게  전전과 전쟁 당시의 군국주의를 상기시키는, 일본과 미국과의 사이에서 매개자가 되어 대미 종속 체제를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기시 노부스케는 바람직한 인물이었다. 

이시바시 단잔과 기시 노부스케

     

전후 국체의 허구와 뒤틀림을 안타까워하고 반역 의도를 온몸으로 표현한 이들이 있다. 우파인 미시마 유키오가 1970년 11월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부를 방문해 총감을 인질로 삼고 결국 할복자살했다. 미시마는 격문을 통해 자위대는 미국의 용병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한편  좌파로부터의 반역 의도가 있었다.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이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대일본 제국주의가 패전으로 타격을 받았지만 그 죄의 청산과 보상 의무를 모호하게 얼버무렸으며 미일 안보 체제의 비호 아래 부활했고 인민과 자원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일본 자본주의의 핵심적 기업 그룹을 형성하고 있기에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이 사건 전에 천황이 탄 열차를 철교 위에서 폭파시키려고 했었다. 이들에게 쇼와 천황은 대일본 제국주의 상징임과 동시에 전후에도 군림함으로써 재건된 일본 제국주의 상징이었기에 뒤처리를 하려고 했었다. 이외에도 국체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국민의 천황과 천황의 국민으로 회귀 움직임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천황에게 국체는 어떤 의미였을까? 2.26 사건은 충의를 말하는 청년 장교들이 천황 근저에 있는 간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천황에게 자신의 측근을 해치는 움직임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용서할 수 없었으며 진압을 명령했다. 이를 통해 천황만이 도의를 지니고 있으며 천황 외부 어디에서도 도의를 기대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천황으로부터 정통성의 원천을 인정하고, 천황으로부터 떨어져서 확립된 도의는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허망함을 천황 자신이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저자는 전후 국체의 종점을 미국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일본’으로 출발한 전후 일본은 ‘미국 없는 일본 시대’로 들어간다. 미중 국교 수립과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언(금-달러 태환 정지)가 그것이다. 두 사건은 전후 미국 국가 정책의 수정이다. 일본의 경제력 약진이 배경이 되었다. 일본의 대미 종속을 통한 부흥 노선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면서 경제 분야에서 종주국을 위협하게 되어 미국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1990년대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된 냉전 시대의 종말은 미일 안보조약의 존재 목적을 위협하게 되었다.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 제1의 동맹자로 대우해 줄 필연성이 소멸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대미 종속은 더 심화되었다. 전후 일본 대미 종속 노선은 국가 부흥을 위한 수단이었으나 어느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일본의 미국 시대’가 되어 버렸다. 만세일계의 황통은 천황에 의한 지배 질서의 영원성을 함의하는데 이는 미일동맹의 영원성으로 치환된다. 아베 정권의 미국에 대한 집착은 이를 잘 보여준다.      

결론을 내리자. 저자는 일본의 전후 국체 말기인 현재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 ‘적극적 평화주의’ = ‘미국의 군사전략과의 일체화’ 

현 일본의 정치 상황을 이 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리고  천황의 말씀에 드러나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나는 평생 동안 이런 노력을 기울였으니 알아 달라’는 호소로 파악하는 ‘저자의 감성’이 무척 인상 깊다. 


본사와 제휴한 외부 필자에 의해 서평이 작성되었습니다. 서평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본사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필자 : Nebul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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