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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Nov 06. 2020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일본의 ‘에도 시대’는 대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집권한 1615년부터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大政奉還, 막부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한 사건)까지를 이르는 시기로, 일반적으로 전근대 일본의 황금기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흔히 18세기 중후반, 즉 영조-정조 통치기를 ‘한국의 르네상스’라고 인식하는 것과 비슷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인식은 조선이 정조 사후에 쇠퇴 일로를 달리다가 결국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가장 최악의 형태로 겪었던 그 쓰라린 기억을 현대의 한국인이 어떻게든 극복해내고자 만들어 낸, 본능에 가까운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다만 최근에는 18세기의 조선을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본 한국사학의 연구 성과들은 보다 객관적인 진실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한국, 중국과는 달리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여 열강이 되었다고 분석하기 위한 배경 설명에 가깝다.

  저자는 본서를 통하여 “에도 시대는 전근대 일본의 황금기였다.”는 인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의문에 활용된 표현이 바로 본서의 소제목인 ‘진보’와 ‘퇴보’이다. 필자는 소제목에 사용된 이 두 단어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진보와 퇴보만큼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기준으로 보았는가에 따라서 같은 상황이라도 진보가 되거나 혹은 퇴보가 될 수 있다. 둘째로 진보나 퇴보라는 문자 자체가 주는 평가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어느 국가든, 어느 사회든 더욱 나빠지기 위하여 어떠한 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이 나아간 것인지 물러난 것인지에 대하여 냉철한 평가가 가능하다. 

  저자는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에도 시대를 ‘퇴보의 시대’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 시작을 도쿠가와 막부와 다이묘들이 스스로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럽과의 교류를 봉쇄한 쇄국으로 보았다. 이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보다 자유롭게 왕래하던 센고쿠 시대에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저자가 퇴보라고 평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서는 크게 세 장으로 나뉘어 에도 시대를 살았던 백성과 의사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 까닭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인 이야기 2 :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표지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정치적⋅제도적 변화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일본의 전근대사에서 에도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쇄국 체제를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던 것과, 이를 바탕으로 경제력이 성장하고 나가사키에 데지마(出島)를 만들어 네덜란드와 교류하였다는 등의 동시대 한국, 중국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거쳐 아시아에서 유일한 열강으로 성장하게 된 바탕이 이미 에도 시대부터 마련되었다는 설명으로 연결될 것이다. 단순하게 인과관계만 놓고 본다면 굉장히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관점을 다르게 하여 생각해보면 쉽게 의문을 찾을 수 있다. 정치적 안정과 뒤바꾼 정체 현상은 무수히 많은 계급 또는 계층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다. 쇄국을 통한 경제 활동의 제한은 상업의 축소를 가져왔을 것이다. 반면 기존에 천대받던 직업이 부상하거나, 새로운 계층이 두각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변화도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제도적인 변화와는 별개로 천재지변, 흉년과 대기근, 전염병의 창궐 등 당장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수히 많은 요소들은 지배층의 그 어떤 노력보다도 빠르고 확실하게 사회 전반을 동요시킬 수 있다. 에도 시대의 일본 역시 이 위협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지배층이 지향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아래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에도 시대를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본문에서 러시아 화가 바실리 베레샤긴의 <전쟁의 극치>(1871)와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을 소개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본서의 제목에 ‘일본사’가 아닌 ‘일본인’이 쓰인 것은 바로 본서가 에도 시대를 살았던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에도 시대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시스템을 강제한 시대”     


 에도 시대의 도쿠가와 막부의 무사 집단은 일본 각지에 거주하는 피지배층의 백성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배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연재해, 흉년, 소속된 지방의 사정 등 다양한 이유로 어려움을 겪던 것이 농민이었다. 에도 시대의 농민들은 기근이 발생할 때마다 수만에서 수십만 단위로 굶어 죽었다. 

<덴메이 연간의 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기리는 아오모리현의 공양비>

굳이 기근이 아니더라도 평상시 일본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나아졌던 것 같지는 않다. 연구자에 따라 수치에 차이는 있으나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세금과 소작료로 납부했던 것이 이 시기 일본 농민들이었다. 한국 경제사학자 이헌창 교수님의 논문에 의하면 동시대 조선에 비하여 일본 사람들이 더 많은 양의 미곡을 생산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에도 시대의 백성들 중에서는 빈곤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본문의 「1장. 백성들의 이야기」에서 소개된 ‘마비키(間引き)’를 보면 알 수 있다. 

 마비키는 양육하기 어려운 상황이거나 장애, 기형 등의 이유로 가족의 경제력이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영유아를 살해하는 것이다. 임신에 대한 정보와 낙태 등의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서는 생존에 가장 유리한 소규모 가족을 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가족계획이었던 것이다. 지배층이 데지마를 통하여 외국으로부터 다양한 물품들을 공급받고,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먹고사는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낳은 아이조차 죽여 없애야 할 만큼 치열한 생활이 공존했던 것이다. 이것은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윤리의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에도 시대를 통틀어 존재한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사회 현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전근대 국가는 국방력의 확보와 진휼(賑恤)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만약 국가 간의 전쟁이나 내전이 일어났다면 외적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하여 군사가 필요했다. 한편, 기근이 장기화된다면 곡식 가격을 안정화하거나 직접 곡식을 배분하였다. 이를 통하여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와 수세(收稅)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에도 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를 살펴보자.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 체제를 통하여 무역을 통한 이익을 지방의 여러 번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을 차단했다. 그리고 전국의 다이묘의 세력을 가늠하는 지표를 해당 지역의 벼 수확량으로 설정함으로써 벼농사 이외의 선택지를 없애버렸다. 대내외적으로 일본을 고립시키고 정체시킨 것은 그들의 지배체제를 확고히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에도 시대에 나타난 기근에 고통받는 백성들, 마비키의 성행, 나아가 인신매매, 식인 등의 모습은 결국 막부가 초래한 자충수이자 인재(人災)나 다름없던 것이다. 

 저자가 에도 시대를 진보가 아닌 ‘퇴보’라고 평가한 첫 번째 이유가 이것이라 할 수 있다. 백성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기득권을 지키고자 눈과 귀를 가린 막부와, 당장 눈앞에 닥친 굶주림 속에서 이중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각자 살아남기 위하여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나아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희미하게나마 열려 있던 사회적 신분 상승을 꿈꾸며 움직이던 계층이 2장에 소개되는 ‘의사’들이었다.           


 “농민의 삶과 고통을 치료해준 의사들”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위 문장들은 현대에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의과대학 학생들이라면 반드시 보게 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 한 문장이다. 이 선서문은 법적인 강제성이 있다기보다는 의사가 될 개인의 양심과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스스로와의 약속이라 할 수 있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겠다는 고귀한 사명감만으로 이 선서를 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인정 또는 경제력 등의 현실적인 이유로 접하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에도 시대에 활동한 의사들 또한 비슷하였다.

 에도 시대의 지배층은 무사였다. 그렇기에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 문인들은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과거 제도와 같이 문인을 선발하는 제도가 없던 에도 시대에서 학자들이 입신양명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였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가뜩이나 기근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을 이중으로 괴롭힌 것은 바로 전염병이었다. 그중에서 천연두는 공기 중으로도 전염되는 전염력이 매우 높은 병이었고, 동시대 한국과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인류를 괴롭히던 바이러스였다. 천연두는 특히 영유아의 사망률이 굉장히 높은 질병이었고, 심할 경우 한 마을이 사라졌을 정도로 치사율도 높았다. 이러한 상황은 에도 시대 일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의 한국과 대비되는 일본의 특징은 의사가 의학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신분의 한 계층이라기보다는 승려, 유학자 등 다양한 출신들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이미 민간에 의학적 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특징인데, 이러한 민간용 의학서를 출판하는데 앞장선 것 역시 가지와라 쇼젠 등의 승려들이었다.

<혼고 야쿠시(本鄕藥師) : 1670년, 에도에 전염병이 유행하자 사람들을 치료하는 약사여래를 모셨다, 도쿄 혼고 소재>

 에도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유럽과의 교역을 통하여 서구의 의학 지식을 비교적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쇄국 체제가 확립된 이후로는 이 역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킨 것이 천연두였던 것이다. 의사들 중에서는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 혹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활용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서구로부터 유입된 난의학을 연구하던 의사들은 우두법을 일본에 보급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였고, 여기에 상업 등으로 부호가 된 구마가이 렌신과 같은 사람들이 도움을 더하면서 몇 년 만에 우두법이 일본 전 지역에 실시될 수 있었다. 의학을 공부하고 의술을 행하게 된 계기는 달랐으나, 본질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제하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퇴보에 가까운 에도 시대에서도 이러한 점은 분명 더디지만 진보하는 발걸음이었다 할 수 있다.

<"일본의 아리스토텔레스" 가이바라 엣켄 동상, 규슈 후쿠오카 긴류지 金龍寺 소재)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서양 근대 의학사 연구자인 윌리엄 바이넘 선생의 “진보에 대한 믿음에 빛을 잃은 세상”이라는 표현을 인용하였다. 이어 센고쿠 시대로부터 메이지 유신 이후까지의 일본이 단기적으로는 사회가 퇴보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이를 극복하고 조금씩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진보했다고 믿는다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퇴보하는 기간 동안에 수많은 백성들이 겪지 않아도 됐을 괴로움과 불필요한 노력들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하여 가정은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 에도 시대의 의사들이 막부의 쇄국 체제에 좌절하여 끝내 의학마저 포기하거나 우두법을 적극적으로 실시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은 더욱 비참한 생활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위기와 고난의 상황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는 노력과 시도였던 것이다.

  <맹자(孟子)> 양혜왕 편에는 맹자가 양혜왕에게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이어 맹자는 통치자에게는 먹을 것이 넘치는데 백성들은 굶주리고 아사한 시체가 들에 방치되어 있다면 이는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설명한다. 에도 시대의 지배층은 이 구절에 나오는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근에 이어 질병에 까지 생명을 위협받았던 백성들을 구했던 것은 통치제도도, 통치자도 아닌 지배층이 그토록 봉쇄하고자 했던 서구로부터의 의학 지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켰던 같은 백성, 의사들이었던 것이다.          


 흔히 황금기라고 표현되는 에도 시대조차 막부의 쇄국 체제에서 비롯된 수많은 문제, 정치와 무관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산의 정상만을 보다 보면 주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풀과 꽃송이들을 놓치는 법인데, 본서는 그 풀들과 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도 시대를 힘겹게 살았던 백성들과, 그 백성들을 살려내고자 했던 의사들. 절망이 절망을 만나 새로운 희망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19세기 일본이 안팎으로 무수한 격동을 겪으며 차마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역사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저자는 본서를 통하여 그 작지만 묵직했던 움직임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에도 시대를 ‘퇴보의 시대’라고 표현함으로써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었다. 

  에도 시대는 그것이 어떻게 에도 시대를 살던 일본인들의 잘못이 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조선 또한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시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배층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고, 피지배층은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제국주의 열강들이 막강한 군사력을 위시하여 침략해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고, 여기에 대한 대응이 미흡하고 부족했던 것이었다. 

  본서는 필자가 모르고 있던 다양한 모습의 에도 시대를 마치 좋은 강의를 듣고 있는 것처럼 담담하고 다정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역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역사학 논문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백성들의 삶,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일생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과 아주 사소한 명칭까지도 상당히 방대한 연구 성과를 참조했음이 느껴지는 섬세한 문장들이 무엇보다 매력적이라 느껴졌다.

  지금 당장 우리는 코로나 19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고통과 변동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 위기는 제너가 천연두를 극복하기 위한 종두법을 찾아냈듯이 우연한 사건으로 극복해나갈 수도 있고, 아직까지 지구 상에서 해결되지 않은 무수한 전염병들처럼 앞으로도 인류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주며 공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제너>

필자는 십 년, 백 년 뒤에 이 세계에 살고 있을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며 마치 지금 우리가 흔히 19세기 조선을 비판하고 18세기 조선을 칭찬하듯이 평가하고 있다면 상당히 슬플 것 같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을 때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본사와 제휴한 외부 필자에 의해 서평이 작성되었습니다. 서평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본사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필자 : U.Nell

* <일본인 이야기 2> 북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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