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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Nov 18. 2020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어느 유적을 답사하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꽤 의미가 깊다. 만약 지금은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절터를 답사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풀과 돌들이 무성한 빈 터만 본다면 단순히 버려진 땅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곳에 온 이유를 궁금해한다거나 실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곳에 어떤 왕조를 대표하는 사원이 있었다면? 이곳에 절이 있을 때 우리 역사에서 유명했던 고승(高僧)이 머물렀다면? 공간에 역사성이 부여되는 순간 그곳이 갖는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답사에서 미리 알고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렇듯 같은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그 공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곳이 될 수도 있고, 의미가 담긴 ‘장소’가 될 수 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적도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나라인 중국은 어떨까? 아마 일상에서 중국이라는 국가와 큰 접점이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중국 유명 도시들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백, 수천 년 전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더더욱.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중국 사람들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역시 아는 만큼만 볼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중국의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약 3천여 년의 역사를 시안, 뤄양, 카이펑, 항저우, 난징, 베이징이라는 여섯 도시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여섯 도시의 공통점은 각 시대 또는 왕조를 대표하는 ‘수도’였다는 것이다. 수도였던 만큼 여섯 도시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 혹은 지도자의 이야기부터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본서는 중국을 연구하는 저자의 시각에서 여섯 개의 지역을 그 속에 담겨있는 중국사와 함께 소개함으로써 여섯 도시가 현재 중국에 부여하는 역사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본서에서 살펴본 여섯 도시의 각 특징들을 중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표지


천년고도 시안, 고대 중국의 화려한 부활
 

 우리에게 ‘장안’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시안은 서주⋅진⋅한⋅수⋅당 등을 비롯하여 역대 가장 많은 중국의 왕조가 도읍하였던 곳이다. 시안은 한 무제가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실크로드 개척을 시작하였던 ‘기점’이 되는 곳이었다. 실크로드는 중국⋅카자흐스탄⋅키리기스스탄이 공동으로 신청하여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천 년 전 처음 만들어진 동서 교역의 상징이 현대에 이르러 중국-중앙아시아의 교류와 협력의 장소가 되면서 새로운 버전의 실크로드가 되었던 것이다.

<당나라 장안성의 서문西門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실크로드 2,100주년 기념 조각상>


 중국은 실크로드의 역사성을 현재에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상주단대공정’이라는 중국 역사 프로젝트를 통하여 하⋅상⋅주의 주요 활동 무대를 시안으로 설정, 그 연대까지 비정함으로써 중화문명의 유구한 역사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향후 중국이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중국의 각 민족의 응집, 역사적 자부심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중화질서를 21세기 현대에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시안이 단순히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라거나, 하⋅상⋅주의 무대였다는 것만으로 시안이 중화문명을 상징하는 지역이 된 것은 아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존속과 멸망을 반복했던 수많은 왕조와, 인생의 고락을 보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빛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본서 역시 시안 부분을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시안은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스스로 시황제가 된 진왕 영정의 찬란한 그 순간을 함께한 곳이다. 또, 젊은 군인 곽거병이 한나라가 그토록 원했던 흉노 토벌을 실현하고 개선(凱旋)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유기를 통하여 친숙해진 이름인 현장 삼장이 기나긴 서역 고행을 마치고 돌아온 곳이기도 하다. 중국사에서 유일하게 여자로 황제가 된 무측천의 치세가 닿았던 곳이기도 하다. 

<시안 병마용 박물관 앞, 진시황의 상>

 제국의 시작을 알린 곳이자, 민생과 치안을 흔들어 놓은 외적을 무릎 꿇린 곳. 새로운 사상과 종교, 나아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전달되어온 곳, 새로운 통치 질서의 가능성을 실현한 곳. 시안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중국은 천년고도 시안을 통하여 중화의 기원을 수천 년 전으로 소급해가고 있으며, 그것을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더욱 확실하고 착실하게 스스로의 캐릭터로 삼고 있다. 

 근시안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마치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 끌어오려는 허황되고 무의미한 시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근대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왕조에 조공-책봉 관계를 수락하고 지속해 온 배경을 살펴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압도적인 군사력에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합리적인 외교를 하였던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군사력이 증명되지 않은 100년, 200년 뒤의 중화에도 여전히 사대의 예를 다했던 것은 그들이 그간 구축해 온 ‘중화’라는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주는 대외적인 안정감과 명분이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중국은 그 작업을 더욱 발전된 형태로, 더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찬란함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뤄양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낙양, 즉 뤄양이라는 지명이 상당히 익숙할 것이다. 역사서 혹은 역사 관련 서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중원’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지역 역시 뤄양이 있는 하남, 즉 허난 지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이라는 말의 최초 기록 역시 성왕이 낙읍을 건설하면서 “이 중국에 정착하여 여기 백성을 다스리겠다.”는 말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중국과 여러 의미로 뗄 수 없는 지역이 뤄양이라 할 수 있다.

 대의명분과 충과 같이 유교적 이념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관우의 유해가 묻혀있는 관림도 뤄양에 있으며, 중국이 단옷날 쭝쯔를 먹고 용선 경기를 하는 풍습 역시 뤄양에 있던 굴원과 관련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 지역에서 돋보이는 것은 불교 문화재, 그중에서도 석각예술이라 할 수 있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 북위의 효문제가 뤄양으로 천도하고 한화(漢化) 정책을 실시하면서 중국화 된 복식의 불상이 석굴에 대규모 조성되었던 것이다. 

<용문석굴 전경>

 측천무후가 백관들의 간청을 받아 즉위한 곳. 백거이가 상식적인 삶을 꿈꾸며 모자라든 충족하든 즐겁게 살고자 했던 곳. 당나라 문화의 정수라고 평가받는 당삼채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 곳. 그 뤄양의 찬란함이 빛난 만큼 씁쓸한 암면도 존재한다. 바로 중국이 열강들의 침입을 받던 시기에 수많은 중국문화가 불법적으로 반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중국만의 아픔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불법적인 경로로 반출되어 지금까지도 반환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들에게 뤄양이라는 지역은 중국의 찬란한 문화, 예술의 보고(寶庫)이면서 동시에 근대사에 일어난  무지와 이기심에 의한 파괴상이 공존하는 그러한 공간이 아닐까 한다.     


불요불굴(不撓不屈),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카이펑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은 본서에 소개된 다른 도시와 비교했을 때 독특한 지역이다. 우선 주변이 모두 개방되어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에 굉장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럼에도 카이펑이 송의 수도가 된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내륙을 관통하는 수로 교통망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이 선보였던 중국의 4대 발명품인 종이⋅인쇄술⋅화약⋅나침반 중 종이를 제외하고서는 송나라 때 실용화되었다. 송나라에 이르러 중국의 인구가 처음으로 1억 명을 돌파하였으며, 강남에 대규모 농지가 개척되고 교역이 발달하며 동시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송나라의 절정을 묘사한 <청명상하도>의 일부

 이러한 송나라의 번영의 원인을 저자는 ‘국가권력의 절제’에서 찾았다. 대표적인 일화로 송 인종이 “궁중이 적막하기에 바깥 백성들이 즐거울 수 있다. 만약 궁중이 즐겁다면 바깥 백성들은 적막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것이 소개되어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북송의 멸망 원인 역시 금나라 때문만이 아닌, 인종의 일화에서 볼 수 있는 국가권력의 절제가 부재한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송나라가 누린 번영의 원동력은 불요불굴, 즉 한번 먹은 마음은 굴하지 않는다는 정신과 자강불식, 즉 스스로 강해지기를 쉬지 않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이 사라졌을 때 금의 침공을 받은 송나라는 무너졌지만, 그 정신은 천 년이 지난 지금의 중국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천당으로 묘사된 항저우   

  

 항저우는 금의 침공을 피하여 남하한 남송의 수도가 있던 지역이다. 한국 근대사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직후 피난을 시작한 임시정부가 얼마간 머물렀던 지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요리 중에 잘 알려진 동파육을 만들어낸 북송의 문인 소동파와도 인연이 깊은 지역이 항저우이다. 송나라의 범성대가 쓴 『오군지』에는 항저우와 쑤저우를 지상의 천당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항저우에는 서호라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수가 있다. 이곳에는 악비⋅우겸⋅장창수라는 서호삼걸의 무덤과 사당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이민족에 맞서 끝까지 항전한 한족의 영웅이라는 점이다. 이 중에서도 악비는 금나라에 끝까지 항전하고자 하였으나 모반죄로 처형당한 인물로, 치적과 대비되는 비극적인 최후로 인하여 더욱 중국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아름다운 항저우 서호>

 아름다운 물결이 밝은 빛을 받으며 흐르는 서호를 끼고 있으며, 근현대 중국사의 획을 그은 대부호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도시인 항저우. 그러나 그 반짝이는 낭만 속에서도 이민족에 밀려 남하하게 된 남송과 서호삼걸의 애환을 찾을 수 있다.   

  

영예와 치욕이 공존하는 난징  

   

 난징은 주원장이 명을 건국한 곳이자 중국의 국부(國父)라 칭송받는 쑨원의 무덤인 중산묘를 볼 수 있는 곳, 신해혁명의 정신을 기리면서 동시에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수도였던 곳이다. 또한 최근에 들어와 상당히 고도의 발전을 이루어내며 다시금 중국의 핵심도시로 부상 중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전하며 맺은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에 이름이 들어가는 불명예라든지,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이 남하하여 난징에 입성한 뒤 자행한 대학살과 같은 비극적이고 처참한 기억들이 물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인들에게 있어 난징이 가지는 의미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민족’으로부터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낸 결실을 맺은 공간이 아닐까 한다. 주원장은 몽골이 세운 원을 몰아내고 한족의 국가인 명을 난징에서 건국하였다. 신해혁명 이래로 이어진 공화의 바람은 만주족의 국가인 대청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런 중요한 순간을 함께했던 곳이 바로 난징이라는 지역이다.

 필자가 난징에 머물렀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본서에도 소개된 난징 대학살 기념관과 위안소 기념관이었다. 두 사건 모두 일제에 의하여 자행되었으며, 우리의 역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인간적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은 것 같다. 특히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들어가면 볼 수 있는 “可以宽恕,但不可以忘却 (Forgivable, but Unforgettable)",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겠다.’라는 문구는 국적을 불문하고 상당히 큰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 진입구와 기념관 내 인상적인 문구>


 필자가 있던 당시의 난징은 주원장이 잠들어 있는 효릉이나 쑨원이 잠들어 있는 중산묘 근처에 조성된 공원이 있어 주말이면 가족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와 소풍이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평화로운 모습 한편으로는 처절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공간이 공존하고 있던 곳이 바로 난징이었다.

<난징의 효릉과 중산릉>


 이런 의미에서 난징은 현재 중국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상징적인 공간이 아닐까 한다. 특히 일본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문제가 남아있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물론 과거의 고통과 희생자들의 아픔을 정치적으로만 활용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중국이든 우리나라든 아직까지 해결된 것이 거의 없는 이 아픈 역사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와 이(), 과거와 현재가 융합하는 현장 베이징


 베이징은 현재 중국의 수도이자, 명 영락제 이래로 중국 대륙을 차지한 국가의 수도로 자리매김하면서 중화(中華)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도시이다. 시대에 따라 중화를 상징하는 왕조도, 국가도, 그 범위도 달랐으나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특성이 ‘중화’와 ‘비중화’를 구분한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중국과 중국이 아닌 다른 이민족, 국가들을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을 기본으로 삼아, 조공-책봉이라는 사대의 형태를 통하여 주변국들을 중화의 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한반도에 존재한 국가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저자는 만리장성을 소재로 이 중화의 성격을 설명하였다. 흉노족을 막고자 진시황제 때부터 축성되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왕조와 국가가 점멸하는 과정에서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장성은 중국 전근대 건축술이 만들어 낸 성과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배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이는 중화에 해당하는 지역과 민족들에게는 공동체적 동질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중화를 설명하기 위한 만리장성>

 만주족이 세운 국가가 한족의 명나라를 몰아내고 베이징을 차지했을 때도, 그리고 마침내 명을 멸망시키고서도 점차 강성해져 대청 제국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당시 조선의 지식인, 관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구축해온 중화라는 개념이 뿌리부터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사상적 충격이 그동안 한족이 세운 중국의 국가에서 구축한 ‘중화’라는 개념이 상당히 확고하고 폐쇄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사상은 대청 제국이 중원을 통치했던 수 백 년의 시간에도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중국 역시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세계인들이 공유하는 다양한 네트워크들을 제한하고 자체적인 수단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세계에서 역으로 중국의 수단에 침투, 편입하는 형태로 여러 정보나 상품들을 접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는 현대 중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이 바로 이러한 성격들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중국으로부터 이어져 온 견고한 ‘중화’라는 근본이 존재하는 한, 이것은 수많은 형태로 끊임없이 재해석, 재생산되어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라는 과거가 뿌리내려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 수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무한대로 소통하는 현대의 베이징은 향후 중국의 미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본서의 제목은 본문에 나오는 여섯 도시를 수식하기 위하여 ‘중국을 빚어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여섯 도시는 각각 개발되기 시작한 시기도, 국가도 다르고 지역에 남아있는 역사성도 다양했으나 공통적으로 현대 중국이 세계에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중화라는 것을 정립시키는데 공헌한 지역들이었다. 중국은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하였던 여러 왕조와 국가들, 그들이 존재했던 공간에서 여섯 도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현대 중국을 만들어낸 배경이라는 역사성을 부여함으로써 ‘장소(place)'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점은 현대 한국과 비교했을 때 중국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특성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본사와 제휴한 외부 필자에 의해 서평이 작성되었습니다. 서평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본사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필자 : U.N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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