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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Jul 22. 2021

파스타가 열어준 맛있는 인문학 여행길

[편성준의 리뷰]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대부』를 만들고 기술 시사회를 열었을 때 일이다. 

그는 비토 콜리오네가 저격당한 뒤 패밀리 전체가 숨을 고를 때 클레멘자가 마이클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는 장면을 모조리 빼버렸다고 한다. 하도 간섭을 해대는 할리우드 꼰대들에게 이골이 나서 필요 없다고 얘기할 장면들을 알아서 삭제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시사회가 끝나자 제작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다  "이봐, 그 멋진 파스타 요리 장면들은 다 어디 갔지? 얼른 그 장면들을 다시 붙이게!" 

이 에피소드는 미국인들이 파스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지금은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된 피자와 파스타가 사실은 가난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음식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작품 이후로 마틴 스콜세지부터 두기봉에 이르기까지 갱영화에서 남자들이 요리하는 장면은 매우 중요해졌다. 음식을 대하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자세만으로도 주인공의 성격과 인생관을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요리 중 십중팔구는 바로 파스타다.      

나 역시 파스타를 좋아한다. 그러나 어느 날 파스타 맛에 반하는 바람에 ‘음식이 삶의 대부분’이라는 급진적 사고를 갖게 되고 급기야 정년이 보장된 신문기자 일을 때려치우고 이태리로 요리유학을 떠난 권은중 정도는 아니다. 

그가 쓴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를 며칠간 아껴가며 재밌게 읽었다. 이 책에는 ‘맛, 향기, 빛깔에 스며든 인문주의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권은중은 피에몬테 주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요리학교 ICIF를 다녔는데, 그가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스토리아(Storia) 즉 역사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파스타에 꽂혀 이탈리아까지 갔지만 개별 음식보다는 그 음식을 이끌어낸 식생, 역사, 문화 등에 더 관심이 많은 지식인인 것이다. 그가 발견한 볼로냐의 붉은 길(볼로네제 파스타의 붉은색, 좌파의 요새로서의 정치적 전통, 레드 와인의 색깔이 이르기까지)은 그런 궁금증들을 해결해주는 지름길이었다. ICIF 졸업생 중에서 이렇게 이탈리아 피자와 치즈, 와인에 대해 책으로 자세히 다룬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책에서 다룬 ‘맛, 향기, 빛깔’이라는 주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이탈리아 볼로냐라는 도시에 깊게 스민 인문주의의 역사를 배우게 된다. 

이 책은 요리를 배우러 이탈리아에 갔다가 이탈리아 음식은 물론 그들의 역사까지 살핀 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라는 휴머니즘적 가치까지 깨닫고 온 중년 남성의 황홀한 고백인 것이다.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표지 이미지


요리학교와 레스토랑 인턴 생활을 마친 그는 동문수학하던 친구들의 권유로 시칠리아와 볼로냐에 각각 한 달씩 머물면서 이탈리아를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데 그 지평을 열어준 것은 치즈, 살라미(햄), 파스타, 피자, 와인과 같은 그들의 음식이었다. 알다시피 이탈리아는 정치도 경제도 엉망인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로냐 사람들이 늘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이유는 먹거리에 대한 여유와 자부심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볼로네제(볼로냐 사람들)는 식재료가 되는 소나 돼지를 공장식 축사가 아닌 전통 방식으로 키운다. 치즈를 만들 때 옥수수나 사료가 아니라 풀로 소를 키워야 조상들이 먹던 치즈와 똑같은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고집도 꺾지 않는다. 도대체 이 도시는 어떻게 해서 이런 특성을 가지게 되었나 살펴보니 볼로냐는 어둡게만 느껴졌던 중세에 이미 대학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그리스·로마 시대의 영광을 되살린 곳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교황청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반골 기질을 발휘하며 살았고 심지어 여성 평등에도 일찍 눈을 떴다. 그 유명한 단테가 볼로냐대학 졸업생이다. 전 세계 대학의 시초가 되었고 ‘유니버시티(university)’라는 단어의 어원을 제공했던 볼로냐대학이 사상적 자유를 얻어낸 공간이었다면 협동조합은 경제적 자유를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인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도 이 고장에서 만들어진다. 볼로냐 사람들이 늘 밝은 표정으로 웃고 외국인들에게도 친절한 이유는 이런 경제적 여유와 자유로운 시민의식 덕분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메모를 하며 책을 읽는다.


이 책엔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물론 세계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들로 가득하다. 나는 헨리 8세가 정략결혼한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영국 여인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성공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에 멋진 양복과 드레스를 만드는 장인들이 많은 건 오랜 기간 호된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남부에서 한때 귀족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파티 문화가 발달했던 역사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중세에 나타난 고딕 양식이라는 사조가 게르만 부족인 '고트족스러운'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건 우리말로 거칠게 옮기면 '오랑캐스러운'쯤이 된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좋은 책은 이처럼 생각지도 않은 보너스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저자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가보니 ‘자기가 낸 책 중 가장 빠르게 2쇄를 찍었다’는 자랑이 쓰여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책이 많이 팔린 걸 소박하게 자랑하고 있지만 정작 나는 이렇게 잘 만들어진 인문학 책을 알아봐주는 우리나라 독자들의 안목을 자랑하고 싶어진다. 요리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강추한다. 얼른 서점에 가서 이 책을 구입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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