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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디치 Aug 19. 2020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

미중일 3국의 패권전쟁 70년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 표지

 지난 백여 년간 세계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룬 지역은 어디일까? 아마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하는 동북아 지역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백여 년 전 일본은 한국을 침략해서 식민 강점 지배하고 중국 일부를 점령했다. 중국은 국공내전을 거쳐 공산국가인 중공과 자본주의 국가인 대만으로 나누어져 여전히 체제경쟁을 하고 있다. 한반도 역시 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과 공산국가인 조선인민공화국(북한)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겪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두 발의 원자폭탄 투하 뒤 잠시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거품이 꺼진 뒤 고전하고 있다. 불과 백여 년 만에 한중일은 세계 경제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성장하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한다. 

특히, 현재 중국은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다툰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성장하는 중국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해 세계 유일 경찰국가에서 중국과 패권을 다투는 상황이 되었다. 

 1950~70년은 미국은 고도성장과 번영을 이루었다. 그 시절 이후 미국은 세계에 관여하지 않은 지역이 없다. 특히 동북아 지역은 냉전시대 소비에트 연방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였기 때문에 미국이 중동지역과 더불어 신경 써서 관리하는 지역이었다. 

경찰국가 역할을 해 왔던 미국

 저자는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 미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의 관계와 발전을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치하게 그리고 있다. 아마 40대 이상의 독자라면 익숙한 이름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다. 필자 역시 이 이름들이 반갑기도 했거니와 과거에 보도되었던 기사들을 이제야 깊게 이해하기도 했다. 저자는 일본과 중국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없어서 인지 한국과 북한에 대한 기술이 극히 적다. 우리나라 독자에게는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행간에서 우리나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어느 정도의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 겪었던 격동의 시간이 외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요 사건을 기술했지만 필자는 기억하는, 인상적이었던 몇몇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중일은 2010년대 무렵 역사 전쟁을 겪었다. 중국과 한국 내부에서 반일 시위가 절정을 이루고 일본이 침략하여 양국에 끼친 피해를 보상하라는 여론이 양국의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1950년대 배상에 대한 여론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지도자들은 이를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오히려 일제 침략을 고마워하였으며 이를 외교 회담에서 비공식이긴 하지만 표현했다. 중국 공산당은 초반 태동기 때 대만 국민당 정부에 많이 밀려 시골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이때 일제가 중국을 침략해서 국민당 정부가 중국 공산당에 집중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기회로 살아남아 결국 국민당 정부를 대륙에서 몰아내 대만으로 밀어내었다. 키신저가 미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극비에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할 때도 일본의 전쟁 배상은 문제 되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중요한 문제는 두 개의 중국이 아니라 하나의 중국이라는 국제 인정이 훨씬 더 중요했다. 

마오쩌둥(왼쪽)과 저우언라이(오른쪽)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기로 일본이 전쟁 배상 조로 건넨 차관을 들여와 제철 사업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 차관으로 전쟁 배상을 마쳤다고 여겼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학생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정부는 이를 강제로 눌렀다. 이 배상 문제는 2000년대 다야오위도/센카쿠 열도 문제가 쟁점화될 때까지 수면 깊이 잠복해 있었다. 

 한편 대만과 일본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과 대만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대부분 국민의 요구로  일제 강점기 시절의 건물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만 정부는 일본인들이 쓰던 청사를 아직까지 쓰고 있다. 장제스는 한때 일본군에 격렬히 저항했으나 동시에 일본을 우러러보았다.’ 

대만인에게 일본은 억압과 식민지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배움과 발전을 상징했다. 이를 간접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대만을 묘사한 경우가 있다. 대만을 친근하게 대하고 대만인들도 일본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이 대만 여행을 편하게 간다는 통계를 접했다. 다나카 총리 정부 시절에 일본 외무성은 친 중국파와 친 대만파로 나눌정도 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심정으로는 친일을 하더라도 외적으로는 반일을 해야 살아남는 정치 환경을 예나 지금이나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 환경을 그대로 중국과 대만에 적용하였으니 이해가 되지 않은 정치 상황들이 존재했었다. 

 미국은 냉전시대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떨어뜨려 놓으려 노력했으며 일본을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태평양으로 진출을 막는 첨병으로 활용하였다. 이런 외교적 노력이 닉슨 정부 시절부터 전개되었다. 일본은 미국이 자국을 버리고 중국을 중요하게 여긴다 해석하고 공포에 떨었다. 이 시기 우리 정부는 이러한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대처하기보다는 정권 유지에 바쁘지 않았나 싶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고 실각할 위기에 빠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으킨 문화혁명으로 소용돌이에 빠져있었다. 이 문화혁명 와중에 덩샤오핑과 시중쉰은 실각하고 하방 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4인방이 몰락한 후 복권된 덩샤오핑 주도로 중국은 개방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 세계적으로 중국의 잠재력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세계의 공장, 생산기지로 중국이 본격 부각되기 시작한 건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이었다. 1980년대 중국은 우리에게 적성국가일 뿐이었다. 북한과 소비에트 연방과 더불어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었을 뿐이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 국가와 외교를 맺는 북방외교를 구사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중국 정부와 외교 관계는 빠른 편은 아니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천안문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 언론들은 외국 방송사에서 그 유명한 장면, 탱크 앞에서 진로를 막는 학생의 영상을 들여와 반복해서 송출하기만 했다. 

방송이 많이 되었던 중국 천안문 사태 사진 (이미지 출처 : NTD Korea)

이 당시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이 무력으로 진압했다고만 들었다. 중국 공산당 내부의 정치 사정은 한참 지나야 알게 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후야오방은 학생들과 인민에게 사랑받았던 정치인이었으며 시위학생들에게 온정적이었다. 중국 공산당 원로들은 시위대에 강경했으며 공산당에 대항하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무력 진압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후야오방은 실각했다. 중국은 국제 사회로부터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 제재가 중국의 성장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덩샤오핑은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 개방정책의 지속을 천명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세우고 홍콩 반환 직전까지 중국을 막후에서 통치했다. 천안문 사태 이후 냉전체제는 붕괴되었고 미국은 걸프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어 단일 세계 경찰국가로서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데 몰두하였다. 이 시점에서 중국은 차세대 세계 생산기지로서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자본을 유치하고 체재 정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은 중국 시장에 진출하고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본 국내 경제가 거품에서 붕괴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정상회담을 계획했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96년 무렵 세계 경제에 위기가 임박했으나 우리나라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중국은 이 위기에서 큰 위협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회로 삼아 비상할 준비를 했다. 미국은 북한 핵위기를 강경하게 다루었다. 중국, 일본과 협상을 통해 북한을 조정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전쟁까지 고려했던 걸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97년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동아시아 전체 경제 질서를 바꾸려는 거센 움직임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1996년 4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해협에 포격을 가한 지 1개월이 지나 총리가 된 하시모토와 클린턴이 미일 안보조약의 범위를 사실상 대만과 한반도로 확장하는 합의 했다. 이로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새로운 시대로 달려가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미중일 경쟁 본격화(이미지 출처 : 경남일보) 

 장쩌민은 일본을 싫어했다. 1998년 장쩌민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 자리에서 ‘아직도 일본 상류층에는 역사를 왜곡하려 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세력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천황이 마련한 연회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와중에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계속 공격했다. 그 2년 후, 장쩌민 정권의 경제 실세 주룽지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서 일본이 전쟁 행위에 대해 중국 국민에게 공식 문서를 통해 사과한 적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로서 중국의 앞선 지도자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완전히 다른 입장을 내세우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전면으로 나서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집권한 고이즈미 정부를 중국 지도부들은 불안한 게 쳐다보았다.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참배하는 걸 막으려 애썼다. 장쩌민이 개인 서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이즈미는 지지자들인 극우 민족주의자들과의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중국 정부를 설득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2003년 후진타오가 집권하면서 중국은 역사 문제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일본은 잘못된 방법으로 대처했다. 

장쩌민(왼쪽), 고이즈미(가운데), 후진타오(오른쪽)

 미국은 역사 갈등에 관심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이 일본을 신뢰하며 과거사 분쟁을 정치적 사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미국은 아시아의 과거사 전쟁을 도덕적이거나 법적인 사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전략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으로 인식했으며 일본도 이러한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여겼다. 고이즈미에 이어 집권한 아베는 위안부 문제를 외부에 하청을 맡긴 사업 과정으로 비유해 중국과 한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아베가 1년 집권하는 동안 일본은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동중국 해저에 매장된 엄청난 지하자원은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이와 관련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7광구로 알려진 제주도 남단의 해저 매장자원은 민감한 문제였다. 중국과 일본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주변 해역을 중심으로 매장된 석유와 가스를 최대한 많이 차지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나라도 한몫 낄 자격이 있으나 한국 정부 차원 노력이 부족했다. 중국과 일본은 이 자원을 더 차지하기 위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역사 분쟁은 영토 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분쟁과 제7광구 위치도

 한편 2008년은 중국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였다.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의 굴기를 상징하고 세계 패권 국가로의 선언에 해당하는 선전 한마당이었다. 이를 위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일본과의 관계에 부단히 애썼다. 후진타오와 후쿠다는 동중국해 합의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으로서는 중국이 합의 조건을 이행할 의향이 있느냐가 이를 유지하는 핵심 기준이었나 중국인들은 공동 개발에서 공동은 주권을 나누어 갖는다는 말과 같아 받아들이지 못했다. 

 2009년 하토야마가 총리로 집권해서 미국과 문제가 생겼다. 민주당 소속인 하토야마는 마지못해 중국과 화해한 전임 총리인 아베, 아소와 달리 자국의 전쟁 행위를 반성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멀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과 진정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하토야마는 미국이 생각해온 최악의 시나리오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일본이 미국과 멀어지고 중국과 가까워져야 한다고 내세우는 정치인이 출현한 거다. 그러나 하토야마는 우리에게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고 야쿠지마에서 핵발전소가 폭발한 뒤 일본 관료 사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도력과 정치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는 미국과 관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오바마 정부는 하토야마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하토야마는 몰락했다. 그 뒤 일본은 후쿠지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세계로부터 비난받았다.       

 2009년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자신감을 세계에 표현했다. 이때 미국은 금융위기 이후 경기침체의 소용돌이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금융위기의 여파는 영영 쓰러지지 않을 걸로 보였던, 견고했던 기업과 공공 기관을 무너뜨리면서 미국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자신감을 앗아갔다. 일본의 경우 이미 10년 넘게 경제가 부진했기 때문에 금융위기 여파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금융위기는 단순한 경기 위축이 아니라 자유 시장체제의 핵심 원리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체제 전반을 위협하는 문제였다. 

 중국은 국제 금융위기를 무사히 피해 간 정도가 아니라 자국 경제 체제가 멀쩡히 작동하는 걸 목격했다. 왕치산은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행크 폴슨에게 미국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미국의 한계를 지적하는 잔소리를 한참 늘어놓았다. 2010년 드디어 중국은 경제 규모로 일본을 넘어서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이 무렵 우리나라 대중 수출은 대미 수출 규모를 앞서게 되었다. 이 기세라면 중국이 아시아를 차지하는 게 머지않아 보였지만 중국은 실패했다. 거기에서 중국은 일본을 미국과 떼어놓지도 못했다. 전문가들은 하토야마 정권이 중국에 우호적이었음에도 중국 정부가 일본과 밀착한 대가를 받지 못할까 걱정해서 더 열성적으로 일본과 밀착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여기에는 후진타오가 장쩌민을 비롯한 보수파의 비판을 우려해 하토야마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하자마자 일본과 최고위급 대화를 재개하지 않은 정치력의 한계도 한몫했다. 오바마 정부에서는 중국이 일본과의 관계에 신중했던 진짜 이유는 그들에게 일본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방면에 걸친 미국과 중국의 경쟁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남중국해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은 중국의 오랜 목표였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중국이 남중국해를 감당할 말한 군사력을 쌓았다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은 1990년대부터 활발한 무역 교류를 바탕으로 자비로운 강대국으로 이미지를 구축했다. 힘을 잃어가는 미국의 공백을 팍스 시니카가 채우리라는 낙관이 자라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는 떠오르는 중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리콴유는 1990년대까지 일본 군국주의 부활 위협을 꾸준히 경고했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이 부각될 무렵 태도를 바꿔 일본에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역내 안정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으로 중국을 지목하였다. 남중국해 분쟁은 중국이 작은 국가들을 옛 속국처럼 다루고 괴롭히려 한다는 서사 안에서 전개되었다. 우리도 중국이 매력적이고 관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이 오만하고 까다로운 미국을 대체하는 게 우리에게 과연 이익일까 의심하게 된다.      

 댜오위 오다/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가장 첨예한 대립은 헤리티지 재단을 방문한 이시하라의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이시하라는 일본이 댜오위 오다/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여 중국의 과격 행위를 저지하고 어장을 지켜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시하라는 귀국해서 센카쿠 열도 매입을 위한 모금을 시작해 순식간에 수백만 달러를 모았다. 이 행동은 중국을 발칵 뒤집었다. 이 시기 시진핑은 정적 보시라이의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일본이 중국 영토를 침탈하려는 움직임으로 보고 시진핑의 정치력을 가늠하는 상황이었다. 중국 해안 감시선과 민간 어선들이 섬 인근으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에 의해 감시, 조정되었다. 이 이후로 사상 최대 규모의 반일 시위가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중국 정부는 나아가 섬 상공위로 군용기를 띄워 일본과 미국을 긴장하게 했다. 중국은 섬 분쟁에 대처하는 매뉴얼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매뉴얼에 따라 섬 인근에서 일본을 괴롭히고 중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중 목적을 추구했다. 저자는 중국이 이렇게 강경 대응한 바탕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정권 교체기에 발생한 영유권 문제에 엄중히 대응한다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확고한 원칙과 더불어 아베가 재집권할 가능성을 대비였다는 것이다. 둘째, 오바마 정부가 추진한 아시아로의 회귀, 또는 재균형 정책이다.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을 포섭해 중국과 맞서려 한다 판단하고 대응했다는 것이다. 2013년 11월 23일 중국은 동중국해 상공을 방공식별구역으로 선언했다. 이 구역 내에 우리나라 이어도가 포함되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난징대학살을 두고 중일 정부의 대응은 극단적이고 희극적이었다. 특히 중국 선전부가 일본을 굴복시킨 일등 공신으로 공산당을 전면에 내 세운 건 역사 날조였다. 일본을 굴복시킨 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였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일본에 침략해서 고맙다고 표현했던 바와 완전히 다르다. 국제 정치에서 자국의 이익, 정치인의 입지에 따라 움직이는 현상은 새로울 게 없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다. 사실에 기반한, 객관적인 역사 기술이 가능할까 싶다.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국제정치 현상을 미중일 삼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하여 기술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떠올리며 3국의 움직임과 연관시켜 보는 즐거움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이 삼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했음도 어렴풋하게 느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영향을 주는 건 아닐 거다. 힘이 작으면 작은대로 지렛대 역할을 하여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본다. 


지난 70여 년간 역동적이었던 동북아시아의 외교 정치사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있게 서술한 저자의 이야기는, 시간을 할애하여 일 독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지속되는 동아시아 한중일의 경쟁


* 이번 글부터 본사와 제휴한 외부 필자에 의해 서평이 작성됩니다. 서평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본사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필자 : Nebul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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