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공부 (베리타스 알파 기고문)
공부의 이유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공부의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대학 진학과 직업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한다는 답변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3명 중 2명 이상이 같은 취지의 답변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공부 자체가 좋아서라는 응답자는 10명 중 1명이 채 되지 않았다. 대다수 학생들에게 공부의 목표는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을 위한 경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수렴한다. 공부의 방법 역시 자연스럽게 이런 목적 달성에 최적화되기 마련이다.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지 결정하는 것은 입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부의 3가지 유형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 심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3가지 공부법 중의 하나에 길들여진다고 한다.
먼저, 의무감이나 강제에 의한 공부를 하는 수동적 학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상적 학습(Superficial Learning)이다. 공부를 질문에 대한 특정한 답을 찾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로 조각난 형태의 지식이나 정보를 단순 암기하는 방식의 공부를 한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되지 않지만 배움의 깊이가 얕다. 단편적 지식과 정보는 일회성으로 흘러 지나가는 경우가 많고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 어렵다.
이와 대조적인 심층적 학습(Deep Learning)은 무엇을 공부하던지 자발적인 태도와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핵심 주제를 찾고 아이디어에 주목한다. 숨겨진 의미뿐 아니라 다른 주제들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내적 열정과 즐거움을 바탕으로 깊이 있게 공부한다. 단순 암기나 피상적 이해에 그치지 않고 분석하고 다시 종합한다. 평가와 예측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론화의 경지에 이른다.
전략적 학습
입시 경쟁을 하는 우리 학생들 상당수가 세번째 공부법인 전략적 학습(Strategic Learning)을 하고 있다. 한정된 시간과 체력으로 치열한 상대 평가를 거쳐야 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전략적 학습자들은 좋은 성적을 얻고, 주위로부터 인정 받는 것을 공부의 중요한 동기로 삼는다. 앞으로 볼 시험을 분석하여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지 계획한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 배점과 난이도를 꼼꼼히 따져가며 공부한다. 피상적 학습과 달리 전략적 학습자들은 어려운 과학 공식을 알맞게 활용해 문제를 풀 수 있고, 서술형 문제에 적절한 답을 쓸 수 있다.
전략적 학습의 약점
그러나 전략적 학습자들은 진정으로 끌리는 공부를 찾아 개념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거나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공부를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학습한다. 범위를 넘어 선 공부가 오히려 성적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염려하여 지적 모험을 피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필연적인 약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우선 같은 개념을 묻는 문제라도 문제의 형태가 바뀌면 풀이에 애를 먹게 된다. 예상을 벗어난 문제에 대응할 때 필요한 창의적인 유연성이 부족하다. 따라서 난이도가 높고 배점이 큰 문제에 대처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중간은 할 수 있지만 상위권 혹은 그 이상으로 진입하기 쉽지 않다. 예상보다 갑자기 어렵게 출제된 시험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대학 진학 후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입시가 끝나는 동시에 공부의 이유가 되었던 중요한 동기와 목표를 잃게 된다.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 본연의 학문 보다는 일찌감치 고시나 취직을 위한 시험에 매달리기 쉽다. 연구 주제를 발굴하고 선정하는 경험과 훈련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창의적이고 고차원적인 학술 활동을 하거나 연구의 의사 결정자(Decision Maker)가 되기는 역부족이다. 전략적 학습자들은 연구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진을 통솔하는 리더가 되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주어진 연구를 수행하거나 특정 분야의 기술자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략적 학습은 기존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새로운 지식의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전략적 학습
능력이 뛰어난 학생조차도 심층적 학습만으로는 우리 입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절대적으로 많은 학습량과 넓은 범위, 다양한 과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전략적 학습의 바탕 위에 심층적 학습으로 보완하는 방식의 공부를 추천한다. 이를 초전략적 학습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수행하는 다음의 3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첫째, 9대1의 법칙
공부 시간의 90퍼센트는 대상과 시험의 유형에 따른 전략적 학습을 기본으로 한다. 바꿔 말하면 10퍼센트는 꼭 심층적 학습을 한다.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하거나 관심을 끄는 주제에 대해서는 시험이라는 전제를 초월하여 심층적 학습으로 공부한다. 어느 부분을 심층 학습할 것인지 판단할 때 기준은 자발적 호기심이면 충분하다. 스스로 가진 의문과 궁금증을 위한 공부는 재미있다. 공부는 재미있어야 이해가 깊어지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런 이유로 종종 전략적 학습보다 시간당 더 높은 공부 효율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공부할 때 지식의 확장과 기존 지식의 연결 그리고 창의적 사고와 발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둘째, 공부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당장의 시험만을 위한 공부를 해서는 안된다. 눈앞의 시험을 위한 근시안적 공부는 매일매일 일회용품 지식을 사서 쓰는 것과 같다. 벼락치기로 시험을 잘 볼 수는 있지만 그렇게 배운 공부는 시험이 끝나는 동시에 아침 이슬처럼 사라진다. 제대로 해둔 공부는 평생 재활용이 가능하다. 의과 대학에서도 족보라는 기출문제를 달달 외워 얻은 지식은 시험이 끝나면 대부분 사라진다. 의학교과서를 정독하고 논문을 찾아 공부한 학생들이 훌륭한 의사가 될 확률이 높다.
세째, 전략적 학습으로 공부한 내용을 복습할 때 나의 아이디어로 재가공하는 습관을 기른다. 아이디어에 주목하는 것은 심층적 학습의 중요한 특징이다. 전략적 학습으로 공부한 내용이 요리의 재료가 되고, 이런 저런 재료를 골라 나만의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만드는 기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SCAMPER (Substitute, Combine, Adapt, Modify, Put to another use, Eliminate, Reverse) 중의 일부를 활용하여 공부한 내용을 이리저리 가공해 본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지속하는 가운데 암기와 이해가 저절로 되는 것은 물론 비교, 분석, 대조, 융합, 추론, 증명의 능력이 급격히 향상된다. 예를 들면 천안문 사태에 관해 공부했다면 홍콩시위와 비교해보고, 우리의 촛불시위와 대조하여 그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나만의 아이디어로 재탄생 시키는 것이다.
미래의 공부
‘한국의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 15시간씩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한국의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며 이렇게 한탄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으로 급변하는 세상과 우리의 교육 현실을 대조해 볼 때 정말로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본 것은 전략적 학습에 매몰된 우리 학생들이 아니었을까? 나도 모르게 피상적이고 전략적인 공부에 길들여지고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과감히 변해야 한다. 공부는 습관이고, 좋은 습관은 일찍 만들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