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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entMeditator Nov 08. 2024

1920년대 한국 대중가요의 태동

192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음악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음악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민족적 자부심과 위로의 매체로 자리 잡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가 활약했습니다.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윤심덕을 빼놓을 수 없겠죠. 

그녀는 1926년 '사의 찬미'를 발표해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곡은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바탕으로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였습니다. 

윤심덕은 극작가 김우진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 중 사랑에 빠졌지만 사회적 편견과 압박 속에서 함께 귀국하던 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곡의 상징성을 높였고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애리수는 '황성옛터'라는 노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곡은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죠.

이 곡은 1928년에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이 협력하여 만든 곡으로 개성의 만월대 폐허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습니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속 한국인의 상실감과 슬픔을 담아내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여러 가수들이 이 곡을 리메이크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이정숙입니다. 

그는 '낙화유수'라는 곡으로 1927년 영화 주제가로 활동했으며 이 곡은 1929년 음반으로 발매되어 한국 창작 대중가요의 첫 걸음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음악은 대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한국 가요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김서정과 전수린 같은 작곡가들은 이 시기 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김서정은 '낙화유수'를 통해 대중가요 창작의 길을 열었고, 전수린은 '황성옛터'를 통해 시대의 슬픔을 음악으로 표현하며 사랑받았습니다.





음반 산업은 1920년대 후반 일본의 음반 회사들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크게 발전했습니다. 

음악은 음반으로 만들어져 다방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퍼졌고 이는 음악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신카나리아나 강석연이 부른 '강남제비'와 같이 일본 유행가를 번안한 곡들도 등장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풍진 세월' (희망가) 또한 일제강점기 속에서 민족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로 사랑받았습니다. 

이 곡은 미국의 찬송가에서 기원하여 일본과 한국에서 번안되어 불렸습니다. 

한국 대중은 이 곡을 통해 희망과 저항의 정신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이 시기의 한국 대중음악은 전통 음악과 외래 음악이 조화롭게 융합되며 새로운 음악적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음악은 민족의 정체성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문화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음악적 성취는 오늘날 K-pop을 포함한 다양한 현대 음악 장르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 앞으로 다룰 이야기에서 가수들이나 작곡가 및 작사가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빼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단순한 그들의 음악적 여정과 한국대중음악에 끼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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