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연신 TV를 이리저리 틀고 있다가 우연히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변의 여인'은 관계의 미묘함을 포착하며 관객에게 잔잔한 여운을 남기곤 합니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갑작스레 여인에게 묻습니다.
'유학 중에 외국 남자와 함께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오래된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는 듯한 순간이었지요.
그 옆에 있던 남자는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진실을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또 다른 무게였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몇 명 있었어.'
그 순간 감독의 얼굴에는 쿨한 미소가 스쳐 지나갑니다.
마치 모든 걸 이해하고 넘긴 듯한 표정으로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의 쿨함이란 결국 표면적인 것이었다는 것을요.
진심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걸친 얇은 가면 같은 것이었지요.
이 장면을 떠올리며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도의 길을 걸으며 수행하던 두 젊은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비추던 숲길을 걸으며 그들은 어느새 맑은 강가에 다다르게 됩니다.
강가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는데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물가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A 스님은 잠시 멈춰 서서 강물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가만히 다가가 여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물이 발끝을 휘감으며 지나가지만 그는 묵묵히 그녀를 데리고 강을 건넙니다.
강을 건넌 후 여인은 가볍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떠났고 두 스님은 다시 조용히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B 스님이 말을 꺼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조금은 무거운 느낌이었습니다.
'수행자라면 어찌 젊은 여인을 업을 수 있습니까'
그의 질문은 여전히 마음속에 파동처럼 퍼져 나갑니다.
A 스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나는 그녀를 강 건너편에 이미 내려놓았네.
그런데 자네는 아직도 마음속에 그녀를 업고 있구려.'
그 말이 바람에 실려 조용히 흩어지던 순간 B 스님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이 스며듭니다.
쿨함이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과거를 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한 걸까?
아마도 B스님의 마음은 고요한 강물 위에 물결처럼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을 겁니다.
영화 속 장면도 다시 떠올렸습니다.
여인의 과거를 묻던 감독과 그 대답을 듣고 무너져 내리던 남자의 모습이요.
감독은 그 순간 쿨해 보였지만 그저 겉모습에 불과했지요.
진정한 쿨함이란 내면의 평온을 잃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꾸며낸 무심함일까요.
두 스님은 여전히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 스님은 발걸음마다 깨달음을 얻고 있었고 다른 스님은 강물처럼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