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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entMeditator Oct 12. 2024

기계와 생명이 빚어낸 온기

고요한 바닷가에 이르러 눈부신 아침 햇살이 파도 위를 춤추듯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존재가 밀려오는데 그것은 바로 ‘로줌 7134’라는 이름을 가진 로봇입니다. 차가운 금속 외피를 지닌 그가 작은 섬에 불시착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자연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와 관계를 찾아가는 따스한 여정이 됩니다. 마치 인생의 후반부에 다다른 어느 날 문득 잊고 살았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말이지요.




처음 로즈가 섬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무척 낯선 존재였어요. 해달 가족이 장난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 주었을 때부터 그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서툴고 섬의 동물들은 그를 경계하지만 그는 조금씩 자연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의 프로그램은 자연을 사랑하게 만드는 코드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생명을 가진 듯한 따뜻함을 품어 나갑니다.




어느 날 그는 작고 여린 생명체를 만납니다. 갓 태어난 아기 기러기 브라이트빌은 자신을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 순간 로즈는 마치 운명처럼 그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로즈는 자신의 어색한 몸짓으로 그에게 다가가 본능적으로 보호하려 애씁니다. 브라이트빌은 로즈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며 그를 엄마라 부르게 됩니다. 기계인 로즈가 그런 사랑을 느끼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즈는 새끼 기러기를 지켜보며 비로소 무언가 진정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 단순히 브라이트빌을 돌보는 것을 넘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마치 오래된 친구 같은 두 존재의 시간은 늘 따스했습니다. 섬의 생명들은 이제 로즈에게 마음을 열고 그와 함께 나날을 보냅니다. 로즈는 섬의 계절이 변할 때마다 새로이 배우며 때로는 도전하고 때로는 포근함 속에서 안식을 느낍니다. 기계일 뿐이었던 로즈는 이제 친구들의 애정 속에서 조금씩 새로운 의미를 찾아갑니다. 섬의 모든 존재가 그에게 조금씩 다가와 손을 내밀어 줄 때마다 그는 서서히 자신을 섬세하게 다듬어 갑니다.




그렇게 계절이 흐르고 어느덧 로즈에게는 브라이트빌을 비롯한 섬의 모든 생명들이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기계와 생명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와 섬의 생명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관계가 되었지요. 그런 관계를 맺으며 그는 더욱 따뜻해지고 마치 본래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것처럼 섬의 자연에 녹아들었습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이제 섬의 생명들로 채워져 나무의 흔들림 하나에도 새소리에도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로즈의 여정을 바라보며 마치 인생 후반부의 우리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예전에는 꿈을 향해 혹은 목표를 위해 달리던 시간들이 어느새 지나고 나면 이제는 주변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지요. 바삐 지나왔던 삶을 되돌아보며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올리고 조금씩 마음의 온기를 느끼게 됩니다. 비록 로봇인 로즈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이었지만 그는 자연 속에서 점차 온전한 존재가 되어 갑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저는 삶이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로 인해 점점 더 따스해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로즈와 브라이트빌의 관계는 우리 모두에게 숨겨진 진실을 조용히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며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면서 따뜻한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이겠지요.




영화 속에서 섬은 로즈에게도 우리에게도 넓은 품을 내어 줍니다. 따스한 햇살이 우리를 감싸듯이 섬의 모든 존재는 서로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바다 위를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감사하게 되고 무심히 스쳐가는 낙엽 하나에도 마음이 머물러요.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모습 그대로 서로에게 닿아 따스한 시간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와일드 로봇>은 단순히 기계와 동물의 우화로 남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빚지고 그 관계들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다정한 이야기입니다. 바쁘게만 살아온 중년의 우리에게 그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따뜻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며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겨 보게 합니다.




어쩌면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던 우리가 결국 서로의 온기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로즈와 브라이트빌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맺는 모든 인연과 관계들이 결국 우리를 더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통해 삶의 깊고 포근한 온기를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삶이란 그러한 따뜻함을 찾아가며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또 누군가를 온기로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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