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지내는 방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합니다.
바깥의 시간은 분주하게 흘러가는데 방 안의 공기만은 늘 제자리에 머무는 듯하죠.
세상의 속도에서 한 발짝 비켜난 듯한 그 정적 안에서 나는 나를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하루가 특별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다고 해서 외롭다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창문을 닫으면 거리의 소음은 잦아들고,
작게 울리는 냉장고 소리나 라면물이 끓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웁니다.
책상 위엔 반쯤 읽다 덮은 책, 아직 식지 않은 커피잔,
그리고 어디로도 흐르지 못한 생각들이 놓여 있었죠.
그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저녁이었습니다.
그 평범한 저녁 라디오에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
방 안의 공기는 그대로였지만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시작된 노래는 조용히 나를 향해 걸어와 아무 말 없이 마음 한 구석에 머물렀습니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마음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울컥한다기보다는 오래된 감정 하나가 조용히 건드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모르던 기억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 혹은 이미 알고 있던 무언가가 다시 나를 돌아보는 느낌.
낯선 건 아니었고 익숙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다만 그 순간의 내 표정을 나조차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한 동요였습니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던 날도 지금처럼 혼자였던 날이었습니다.
자취방의 허전한 저녁, 라면을 먹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곡에 젓가락을 멈췄던 순간.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오늘 다시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지금도 나는 혼자입니다.
달라진 계절, 달라진 위치, 달라진 나이.
하지만 이상하게도 노래를 듣고 있는 이 풍경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혼자인 이 시간이 그 시절의 기억과 겹쳐지며 그리움도 아닌, 외로움도 아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천천히 마음 안을 메워갑니다.
이 곡의 시작은 알 스튜어트라는 영국 가수의 노래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The Palace of Versailles’—프랑스 혁명을 다룬 곡이지만 빠른 템포 속에 감추어진 허무와 아이러니.
그 노래가 전인권의 목소리를 만나면서 완전히 다른 결로 변했습니다.
혁명의 노래가 한 사람의 체념과 그리움 그리고 말 없는 생존을 품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멜로디는 그대로인데 감정은 전혀 다른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 변화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오히려 처음부터 그렇게 불린 곡처럼 느껴졌습니다.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의 고백이 아니라
남겨진 채 그 자리를 살아내야 하는 이의 이야기였습니다.
말없이 버티고 있는 사람, 이유 없이 무너지는 마음을 가만히 안고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다음 하루를 견뎌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의 노래였습니다.
그날, 나는 말없이 그 노래를 들었습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없던 저녁.
말 대신 음악이 있었고 설명 대신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그 문장 안에 머물렀던 시간은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 고요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도 이 노래는 여러 번 내 삶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한참이 지나 어느 날,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에서 이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습니다.
보라가 말없이 계단에 앉아 있던 장면이었죠.
이별이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마음,
실망과 상실이 겹겹이 쌓인 밤,
그녀 위로 조용히 우산을 씌워준 선우의 말도,
그 순간 흘러나오던 이 노래도,
모두 다 말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그 한 구절이 흐르는 동안,
그녀가 흘리는 눈물 위로 내 마음도 조용히 무너졌습니다.
나 역시 혼자였고 그 시절의 내 마음도 그 계단 어딘가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마 우리는 늘 ‘사랑한 후’의 감정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함께했던 시간은 지나가고,
그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마음을 견디는 일.
그 자리를 감당해야 할 때
우리는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어른이 되어갑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노래는 지금도 내 안에서 천천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듯
끝나지 않아도 계속 이어지는 듯.
그 시절의 나도
그 방도
그 노래도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던 그 저녁처럼
변함없이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