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by 참지않긔


겨울이 길었다.

달력은 빠르게 넘어갔지만 마음은 따라가지 못했다.

계절의 흐름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방 안에는 늘 같은 음악이 흘렀고 주전자에서 오르는 김도 예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세상이 느리게 흘렀다.



빛은 여전했지만 온기가 없었다.

바깥이 따뜻해지고 있다는 뉴스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체온이 더 믿을 만했다.

어느 날, 주전자 뚜껑을 여는 손끝이 조금은 덜 시렸다.

그 감각 하나로 나는 알아챘다.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눈이 자주 멈추었고 귀는 소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창밖의 나뭇가지에 고여 있던 빛이 그날따라 유난히 또렷해 보였다.

땅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작은 풀잎, 그 존재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다.

누군가는 보지 못했을 그 조그만 변화에 나는 오래 시선을 뒀다.



나는 그날 이후로 생각했다.

이번 봄은 조금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라 조금 머물다 가는 계절이기를 바랐다.

아직 내 안의 겨울이 다 녹지 않았기에 성급한 꽃망울보다 차라리 서성이는 바람이 더 다정했다.



나는 그간 무언가를 성취하며 살아왔다.

그 성취가 나를 지탱해왔다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버틴다’는 말이 더 가까웠다.

그 버팀의 끝에 찾아온 이 계절은 더 이상 성취의 배경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이유였다.



봄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그 갑작스러움이 어쩌면 삶을 붙잡는 가장 정직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예고 없이 찾아온 따뜻한 기척에 마음 한 자락이 흔들릴 때 그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한때는 달력의 날짜만 바뀌어도 계절을 느꼈다.

지금은 다르다.

내 몸과 마음이 인지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계절이 시작된다.

그건 아주 조용한 신호다.

익숙한 음악이 낯설게 들리는 아침, 자주 가던 골목에서 처음 본 듯한 나무, 말을 걸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척들.



봄은 그런 식으로 온다.

성대한 등장도 없이, 소란스러운 소식도 없이 그저 ‘있다’는 식으로.



그리고 나는 그걸 느낀다.

아직도 이 감각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겨울을 통과하며 묻어두었던 감정이

햇살 아래에서 조용히 기지개를 켠다.



나의 속도는 더뎌졌다.

더 이상 세상에 맞춰 달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 봄은, 빠르게 흘러가도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작은 온기 하나쯤은 남기고 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이번 봄은, 다만 조금만 더 천천히 가주기를.



나는 달라졌다기보다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것들—전봇대 아래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 의자에 비친 오후 4시의 그림자, 차를 마시다 문득 생각나는 오래된 말 한 줄.

그런 것들이 하루의 중심이 되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변화를 알아차리는 법을 조금씩 다시 배우고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감각이 삶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살아 있게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서 무언가 피어나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 젖은 땅 위에서 시작되는 작은 움직임, 기억 속에서 조금씩 물기를 머금는 말들.



내 삶에도 그렇게 작은 봄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 봄은 무엇을 이룬다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내 안에서 가만히 숨 쉬는 온기,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계절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두고, 바라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았다.



어떤 날은 그냥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클래식 음악 한 곡이 내 하루를 전부 채웠다.



그 노래가 좋았다기보다 그 곡이 흘러나오는 그 순간, 나도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감각이 좋았다.



삶은 예측이 아니라 느낌으로 살아가는 것이구나,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빛 아래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짐이 아니라, 작은 바람 하나가 마음에 생겨났다.



이번 봄은, 그냥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라 조금 더 머물러주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

오래된 감정은 쉽게 녹지 않고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그래서 봄이 왔을 때 나는 손을 뻗기보다는 그저 옆에 조용히 앉아 이 계절이 나를 스쳐가기를 기다렸다.



조금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꽃잎은 망설이다가 조용히 열렸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봄이 나를 전부 안아주지 않아도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괜찮아졌다.



사람은 완전히 피어야만 아름다운 게 아니니까.

덜 핀 채로, 아직 무르익지 않은 채로도 존재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 사실을 이번 봄에 배웠다.



완성되지 않은 계절, 미완의 하루, 조금 늦은 감정.

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게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삶의 태도였다.



어느 봄날처럼 그저 조용히 다녀가고, 잠시 머물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바꾸고 가는 그런 계절처럼.



나는 이 봄에게 고요한 인사를 보낸다.



“너, 참 조용히 다녀가서 고맙다.”

“다음에도 그렇게 와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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