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용한 어느 날 오후,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햇살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어떤 날은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지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너무 길게만 느껴지는 걸까.
분명히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라는 이름으로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인데 그 시간이 내게는 때때로 아슬아슬하게 모자라고 또 다른 날에는 도무지 다 쓰기도 버거울 만큼 남아도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날들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삶이라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의 감각은 과연 어떤 법칙을 따르는 것인지 누구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숨 가쁘게 달려가고 누구는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한낮의 고요함 속에 가라앉아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처음엔 그 차이를 성취나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더 부지런한 사람, 더 유능한 사람, 더 열정적인 사람이 모자라는 하루를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남아도는 하루를 견디는 것이라고.
하지만 조금 더 오래 생각해보면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삶의 모자람과 남아돎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일 뿐인지도 모른다.
삶에 어떤 ‘방향’이 있는 날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
그 방향이 꼭 대단하고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오늘 꼭 보고 싶은 책 한 권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오늘 마음을 전해야 할 누군가를 향한 작고 조심스러운 결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목표들이 삶에 조용한 윤곽선을 그려주고 그 윤곽 안에서 시간은 촘촘히 메워진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그 안에 흘러들어가는 마음의 밀도로 완성되는 것이니까.
반대로 어떤 날은 하루가 이상하리만큼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해야 할 일은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새소리도 햇빛도 어쩐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이불을 정리한 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커피 잔의 따뜻함이 그날의 절정이라면 그 하루는 분명 어딘가 남아도는 시간일 것이다.
그럴 때면 ‘잉여’라는 말이 떠오른다.
요즘은 누구나 가볍게 말한다. “나 요즘 잉여야.”
그 말엔 어떤 쿨한 자기풍자의 기운이 섞여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꼭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사실은, 스스로도 삶의 방향을 잠시 놓쳤다는 고백일지도 모른다.
빅터 프랭클은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의미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생존을 위해 끔찍한 수용소의 시간들을 견뎌냈고 그 안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삶의 ‘왜’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어떻게’도 견딜 수 있다.”
그 문장은 내가 살면서 가장 자주 떠올리는 문장 중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하루에 작든 크든 이유 하나씩을 품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분명할수록 삶은 모자라고 그 이유가 흐릿할수록 삶은 남아돈다.
그리고 나는 모자란 하루가 주는 피로함이 남아도는 하루의 공허함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자주 그런 날들을 오가며 산다.
때로는 해야 할 일이 많아 하루가 두세 시간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어떤 날은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천천히 늘어지는 오후 햇살 아래서 그저 커피 한 잔으로 나른한 시간을 지탱하려 애쓴다.
하지만 점점 더, 삶이란 그렇게 모자람과 남아돎 사이를 오가며 ‘적당한 갈망’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너무 바쁘면 지치고, 너무 한가하면 외로우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해서 늘 그 적당함을 스스로 찾으려는 본능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인생이란 물컵에 물이 반쯤 남았을 때 그것을 반이나 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사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컵 안의 양이 아니라 그 물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일 테니까.
여러분의 오늘은 어땠나요?
시간이 조금 모자랐나요, 아니면 많이 남아돌았나요?
혹시 그 사이 어딘가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흐릿한 상태 속에 있었나요?
그렇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의 하루는 늘 그렇게 완벽하지 않고, 또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하루가 너무 모자라서 피곤했다면 그건 어쩌면 여러분이 사랑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증거이고 하루가 조금 남아돌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다음을 준비할 여백이 만들어지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삶은 어차피 조금씩 모자라고, 또 조금씩 남아도는 것일 테니까요.
그 안에서 우리는 그냥 조금은 부족하고, 조금은 여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