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편을 묵상하며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편 14편을 들으며
이 시편은 세상 속 소란과 혼탁함을 통과하여 조용히 가슴을 두드리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외침이나 명령이 아니라 절제된 한탄으로 시작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נָבָל'(나발) 입니다.
이 표현은 단지 지적 능력의 부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영적으로 굳어져 있는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아는 듯 행하지만 실상은 진리와 자비에서 멀어진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그 사람은 철학적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라기보다는 실존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며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배제하려는 자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אֵין אֱלֹהִים'(에인 엘로힘)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선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의적 거부의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선언은 결국 인간의 전인격적 삶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지우려는 시도이자 피조물이 스스로 주인 되려는 근본적 반역으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는 단지 신학적인 타락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들은 부패하였고, 그 행실은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기서 ‘부패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הִשְׁחִיתוּ' (히쉬히투) 이며 이는 ‘망가졌다’ 혹은 ‘썩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실수가 반복된 상태가 아니라 뿌리부터 부패하고 방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행실이 가증하다’는 표현에서 ‘가증하다’는 말은 'הִתְעִיבוּ' (히트이부) 로 번역되며 이는 하나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행위, 즉 윤리적 일탈뿐 아니라 영적 반역까지 포함하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말은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 삶 전체를 드리는 참된 경건과 순종이 사라졌다는 깊은 절망의 진단입니다.
다윗은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도 아시고 계심을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이는 단순한 감시가 아니라 아버지의 심정으로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합니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모두가 길을 벗어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외면한 것입니다.
이 진단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식과 기술이 풍요롭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부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그분이 실질적으로 삶을 이끄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효율과 성과 중심의 사고는 은혜와 기다림의 자리를 점점 좁혀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없는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점차 ‘의로움’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인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며,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떡 먹듯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폭력성과 탐욕이 얼마나 자연스러워졌는지를 묘사합니다.
고통을 주는 것이 더 이상 죄책감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 시대, 그것이 이 본문이 그려내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 삶은 단지 기도를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략한 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무거운 진단의 끝에서 시인은 놀라운 반전을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의인의 세대에 계시도다.”
이 선언은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켜지는 한 줄기 빛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눈에 띄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고 계십니다.
‘의인의 세대’란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며, 그분의 통치를 사모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숫자에 감동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마음을 가진 자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다윗이 이 시에서 붙들고 있는 소망입니다.
절망적인 현실과 부패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셨고 그들 가운데 머무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이는 단순한 민족적 구원의 선언이 아닙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회복되는 상징입니다.
이 고백은 곧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시리라는 믿음이며 무너진 시대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간절히 기대하는 신앙의 외침입니다.
시편 14편의 마지막 구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는 단순한 소망이나 다윗 개인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기다리는, 민족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적인 선언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מִי יִתֵּן מִצִּיּוֹן יְשׁוּעַת יִשְׂרָאֵל” (미 이텐 미츠시온 예슈아트 이스라엘)
직역하자면 “누가 줄 수 있겠는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는 감탄과 기대, 애통과 신뢰가 함께 엉켜 있는 시적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하실 것이라는 깊은 확신이 담겨 있지만 동시에 지금은 그 구원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현실적 간극도 느껴집니다.
시온에서 시작되는 구원이란 단지 나라의 회복이나 정치적 안정이 아닙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상징적 이름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즉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에서 구원이 나오기를 원한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며 구약 전체를 통틀어 메시아적 기대와 맞닿아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속 단어인 “יְשׁוּעָה” (예슈아) 는 ‘구원’예슈아 혹은 ‘구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나중에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예수’(예슈아, 예수아)의 이름과 연결됩니다.
이는 다윗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그 고백은 장차 오실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고백 앞에서 우리는 멈추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시선을 들어 시온을 바라봅니다.
이 눈길은 단지 상상이나 위안의 환상이 아니라 시간 너머를 내다보는 믿음의 시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하시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아직 오지 않은 구원을 미리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시편 14편에서 묘사된 타락과 깊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전히 무시되며, 진리는 상대화되고, 선은 희미해져 갑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시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온은 먼 과거나 상징이 아닙니다.
시온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구원을 준비하시며 회복을 시작하시는 실제적인 공간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구절을 가슴에 품고 멀리 있는 하나님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지금은 다시 오실 그분을 바라보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단지 과거의 노래가 아니라 오늘의 기도요 내일의 찬양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라는 고백은 기다림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시지 않으며 응답을 늦추시는 듯한 침묵의 시기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낙심하고, 흔들리고, 때로는 신앙의 언어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무너진 자들 속에서 구원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제된 성과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의 심령을 찾으시며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의인의 세대’를 일으키십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의인의 세대’는 특출난 도덕적 우월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끊임없이 회개하고 진리를 붙들며 그분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자들의 무리입니다.
그 무리 가운데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다윗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 자들”에 대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이것은 고통과 소망이 공존하는 성경적 현실주의입니다.
성경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으며 어둠을 덮지 않습니다.
대신, 그 어둠 한가운데 하나님의 빛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을 따라 다시 시온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시편 14편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한 초대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이 나오기를 원하도다”는 이 구절은 모든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울리는 초청입니다.
너희는 여전히 시온을 향해 걷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드러날 그날을 소망하고 있는가?
이 묵상은 신학적 체계로 설명되기보다 삶으로 고백되어야 하는 진실입니다.
구원은 때로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편처럼 우리의 기도가 오늘 다시 시온을 향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편의 마지막 여운은 마치 오래된 예언자의 숨결처럼 부드럽지만 심오하게 우리를 침묵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절망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사이에 놓인 그 긴 간극은 너무도 넓게 느껴지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거리를 먼저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은 우리가 뛰어가서 얻는 어떤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낮아지심으로 시작된 선물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라는 고백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체로 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구절은 “מִי יִתֵּן” (미 이텐) 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누가 줄 수 있을까?”라는 표현이지만 히브리어의 이 구조는 실상 “오, 제발 그렇게 되기를!”*이라는 탄식과도 같은 간청의 어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만이 그 유일한 구원의 공급자이심을 드러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는 고백 앞에서 마치 무대 한가운데 홀로 선 듯한 떨림을 느끼게 됩니다.
감추고 싶었던 내 속의 이기심과 나태함, 자주 하나님을 외면했던 습관들이 그 시의 언어로 드러날 때 우리는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죄가 아니라 치유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시편을 통해 우리를 정죄하시기 위해 진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게 하여 회복으로 이끄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애통함을 진심으로 겪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진실한 기도가 됩니다.
그것이 말이 되지 않아도 그분은 들으시며, 품어주시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을 일으키십니다.
“여호와는 의인의 세대에 계시도다.” 이 짧은 문장은 긴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로가 되는 선언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한 시대 가운데서도 여전히 자신을 찾는 이들의 한가운데에 거하십니다.
‘의인’(차딕)이라는 말은 완전한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 애쓰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의인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인식하고 주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은 수가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 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와 삶 속에 하나님은 머무르십니다.
시편 14편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세대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 시대에도 '나발(נָבָל)'의 목소리는 여전히 큽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말로 부정하지 않더라도 삶의 우선순위와 결정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방식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의인의 세대’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세대에 속하겠노라는 결단으로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결단은 거창한 시작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고 사적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예컨대,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하는 것, 하나님께 불안한 마음을 솔직히 토로하는 것, 힘들더라도 정직하게 살아내려는 노력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의 세대’로 세워가십니다.
회개는 단지 죄를 고백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방향을 다시 돌리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 전환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그 회개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그곳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무너졌던 마음, 흩어졌던 소망, 혼란스러웠던 신앙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다시 단단히 붙들리게 됩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은 결국 소망으로 끝이 납니다.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지금은 눈물이 흐르지만 결국 그 눈물은 기쁨의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시온에서 임할 때 야곱의 고통은 기쁨으로 바뀌고, 이스라엘의 눈물은 찬양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하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시편은 단지 과거의 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도 유효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이 시편은 다시 시온을 바라보게 합니다.
다시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묻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도 선을 행하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늘도 시온에서 나오는 그 구원이 제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피난처이다. 나는 너와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