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중간사 15부
유대 역사를 보다 보면, 종종 우리가 잘 모르는 이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는 걸 보게 됩니다.
시몬 마카베오, 혹은 시몬 타씨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예요. 다섯 형제 중 셋째였고, 군사 지휘관으로서보다는 정치적 수완과 종교 지도력으로 주목받았던 그가 결국 유대 민족의 독립을 현실로 만든 장본인이었죠.
말 그대로 독립 왕국의 문을 연 사람, 하스몬 왕조의 시작을 알린 주인공입니다.
오늘은 조금 길게, 하지만 편하게. 이 시몬이라는 인물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가 어떻게 유대의 지도자이자 대제사장, 나아가 한 나라의 건국자가 되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읽다 보면 당시의 정치 상황, 종교 갈등,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새길 만한 메시지까지 함께 떠오르실 거예요.
시몬이 등장하던 그 시기, 기원전 2세기 중반은 정말 복잡한 시대였어요.
유대 땅은 명목상으로는 셀레우코스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그 제국 자체가 이미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죠.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무리한 정책으로 유대인을 억압하다가 죽고, 그 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이어졌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나타난 인물이 데메트리오스 2세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정통 계승자라 주장했지만, 또 다른 세력인 트뤼폰이라는 장군이 자신이 키우던 소년 왕을 앞세워 반기를 들고 있었죠.
그러니까 시리아는 일종의 내전 상태였습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안 그래도 파르티아 쪽에서 외침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전선을 줄여야 했어요.
그때 그가 선택한 방법이 뭐였을까요?
유대인 시몬에게 자치권을 주는 거였습니다.
대신 조세 면제를 포함해서 사실상 "맘대로 다스려도 좋다"는 신호였죠.
이건 시몬 입장에서 보면 절호의 기회였고, 그 기회를 그는 놀랍도록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단순히 셀레우코스를 떼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로마와도 외교 채널을 열어버리죠.
그렇게 유대는 오랜만에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땅이 됩니다.
하스몬 왕조의 최대 확장 강역
그렇다면, 셀레우코스가 완전히 사라졌느냐? 그건 또 아니었어요.
예루살렘 한복판에 아크라 요새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여긴 그야말로 헬레니즘 세력의 최후 보루였어요.
이 요새는 안티오쿠스 4세가 직접 명령해서 만든 군사 요충지였는데요,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성전과 성전 주변을 통제하고 유대 전통을 억압하던 상징이었습니다.
거기엔 주로 헬레니즘에 동화된 유대인들—당시엔 그리스 문화가 세련되고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졌기에 일부 유대 지식인들이 이를 받아들였거든요—과 시리아 출신 병사들이 주둔했습니다.
친헬레니즘파 대제사장 메넬라우스도 이 요새에 의지해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고요.
시몬은 이걸 그대로 둘 수 없었죠.
141년에 드디어 아크라 요새를 함락시킵니다.
함락 후 그는 거기 주둔하던 병력과 헬레니즘 지지자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허물어버립니다.
성전보다 더 높은 언덕을 깎아 성전보다 낮게 만들어버린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질 정도예요.
그만큼 철저히 흔적을 지운 거죠.
이 사건은 유대 민족에게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완전한 자립을 의미했습니다.
시몬이 정치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그의 시대를 기점으로 유대 사회는 종교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신약성경에서도 익숙하게 들어봤을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귀족 계층 중심이에요.
제사장, 상류층, 성전 권력과 가까운 사람들.
이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했고, 천사나 부활 같은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보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태도였다고 보면 돼요.
반면 바리새파는 그에 비해 일반 백성들에게 훨씬 가깝고, 율법 해석과 교육 중심이었죠.
구전율법까지 중요하게 여기며 일상의 경건을 강조했고, 부활 신앙도 믿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과도 자주 부딪히게 되는 그 바리새인들, 바로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파가 정식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건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1세 시대부터예요.
하지만 씨앗은 이미 시몬 시대에 뿌려졌어요.
특히 시몬이 대제사장과 민족 지도자—즉, 종교 권력과 정치권력을 동시에 갖게 된 이후부터요.
전통적으로 대제사장은 사독 계열이어야 했는데, 시몬은 그 혈통이 아니었거든요.
이걸 두고 쿰란 공동체는 시몬을 "사악한 제사장"이라고 불렀고, 자기네 공동체의 영적 리더를 "의로운 스승"이라 칭하며 다른 율법 해석을 주장했어요.
말하자면 이 시대에 종교 개혁과 같은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난 거죠.
시몬은 단순히 외교나 군사만 잘한 게 아니에요.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정비하고, 성전 중심의 율법 공동체를 재건합니다.
사람들이 잊고 지냈던 전통을 되살리고, 성벽을 보수하고, 각지에 요새를 세워 국방도 튼튼히 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죠.
유대 백성과 제사장, 장로들이 모여 시몬을 대제사장으로, 민족의 영도자로, 그리고 그의 자손에게 그 지위를 세습하도록 공식 선포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하나의 왕조의 시작을 의미했죠.
시몬은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쓰진 않았지만, 그가 시작한 통치 방식은 이후 아들 히르카노스를 시작으로 왕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그는 로마 원로원에도 사절을 보내 유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았어요.
오늘날로 치면 유엔에 가입한 셈이죠.
이 모든 일들은 단순히 군사 지도자, 혹은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넘어선 한 나라의 건국자이자 개혁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런 시몬도 배신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사위였어요.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 인물은 여리고 근처에서 시몬과 두 아들을 잔치에 초대해 놓고 기습적으로 살해해 버립니다.
이후 그는 나머지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까지 없애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유대 민중은 시몬의 아들이자 후계자 히르카노스를 지지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하스몬 왕조는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히르카노스는 이후 이두메아를 정복하고 사마리아를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고, 시몬이 만든 토대 위에 완전한 왕국을 세우게 되는 거죠.
시몬 마카베오는 역사 속에서 흔히 조명되지 않지만, 사실상 유대 독립의 아버지라 불러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외세로부터 유대를 해방시켰고, 성전과 율법을 회복했으며, 새로운 정치 구조를 만들어냈어요.
물론 그가 만든 구조는 이후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민족의 자주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는 단연 독립과 신앙의 상징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것을 묻습니다.
신앙과 정치가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용기가 진짜 지도자의 모습일까요?
시몬의 생애는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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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하스몬 왕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실질적으로 하스몬 왕가를 연 시몬 타시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신구약중간사라는 것이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면서도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이 없는 시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신약 시대를 좀 더 깊이 알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 헤롯 왕가의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지만 천천히 꾸준히 걸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