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5편을 묵상하며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시편 25편을 들으며
시편 25편을 읽는 동안 문장 하나하나가 유난히 조용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익숙한 듯 지나칠 수 있었던 표현들이 오늘따라 낯설 만큼 또렷하게 다가왔고 평범한 기도의 문장이 한 사람의 고백으로 살아나 제 안을 오래도록 맴돌았습니다.
무엇 하나 특별한 문장이 아닌데도 그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끌림과 울림이 일었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이의 진심 어린 편지를 다시 펼쳐 읽는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이 한 구절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눌려왔던 존재의 고백이자 무릎 꿇은 영혼이 남김없이 드러낸 절실한 침묵이었지요.
시인은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장하지 않고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해 우러러보았지요.
히브리어 원어에서 ‘우러러보다’는 말은 단순히 고개를 드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들어 올리는, 다시 말해 무거운 존재의 무게를 어깨 위로 힘겹게 들어 올리는 행위입니다.
그에게 있어 기도는 요구가 아니었고 의식적인 고백도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마음을 있는 그대로 올려드리는 간절한 몸짓이었지요.
오늘날 우리의 기도 가운데 얼마나 많은 말이 있습니까.
그러나 시편 기자는 말을 줄이고 자신을 드러내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요구하지 않고 호소하지 않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시선 아래 올려놓습니다.
그 절제와 무언의 고백이 오히려 더 깊은 기도로 가슴에 스며드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러냄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릅니다.
시인은 곧장 자기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어둠을 드러냅니다.
“나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이 말은 단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을 말하는 것이지요.
수치란 죄책감보다 더 근원적인 감정이며 단순한 잘못에 대한 반성 이상의 무력함을 담고 있습니다.
죄책감은 행위에서 비롯되지만 수치는 존재의 깊은 틈에서 생겨납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설명할 수 없는 붕괴감입니다.
시인은 이 수치를 하나님 앞에서 꺼냅니다.
자기 존재가 부끄럽다고, 감추고 싶지만 감출 수 없다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꺼내어 하나님께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기도는 한 차원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갑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잊으소서’라고도 기도합니다.
이 모순된 말 속에 한 인간의 진실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기억해주시기를 바라며 동시에 자신의 젊은 날의 죄와 허물은 기억하지 말아주시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어로 ‘기억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행동으로 이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가 아닌 그분 자신의 성품—긍휼과 신실함—을 기억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답게’ 대해주시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청은 담대함 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신앙의 가장 순전한 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달라고 구합니다.
그는 앎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함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기를, 그분이 직접 걸어가신 길 위를 함께 걷기를 원합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길’은 윤리적 지침이 아니라 인격적 동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말씀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신 길을 함께 걸어가시는 분이셨지요.
이사야가 “이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했듯 시인은 그 길이 단지 방향이 아닌 동행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간청 속에서 시인은 또다시 자신 안의 두려움을 꺼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잊어주시기를 바라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는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격이 전혀 없음을 고백한 채 오직 하나님의 인자만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인자—히브리어로 '헤세드'—는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자신을 제한하시며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단지 회개의 노래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노출시키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죄를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함을 향한 기대를 함께 담은, 말하자면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내면의 죄책감만을 토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는 외적인 위협도 끊이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원수들이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여기서 ‘원수’는 단순한 외부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의 불안, 자기혐오, 수치감과 같은 심리적 압박이 때로는 외부의 적대감처럼 느껴질 때 그 복잡한 감정이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를 지켜 주소서.”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보호의 요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붙들어 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승리’를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어디에도 적이 물러가거나 고난이 사라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고난 속에서도 동행해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구원은 회피가 아니라 관통이며 도피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이것이 시편 25편이 전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다시금 시인은 수치를 언급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한 자로 보이는 것,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듯한 상황, 그것이 그를 괴롭게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인의 마음과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삶의 결과가 그 믿음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괴리에서 오는 수치심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렵습니다.
시인은 그런 깊은 내면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은 기적이 아닌 정체성의 확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편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수치가 되지 않기를.
그는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하지 않았다는 확신 하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고백은 마침내 하나의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내 영혼을 지켜 주소서, 나를 건지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미는 손과도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포위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향해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고백은 놀랍도록 정직하며 바로 이 정직함이야말로 신앙의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괜찮은 사람인 척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더 이상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기에 말하고 설명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그 고통을 보이기만 합니다.
기도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해되지 않아도, 말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울 수 있다는 자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울음조차 하나님의 품 안에서 들려지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편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문제 해결의 통로로만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기도란 존재를 이해해달라는 것이라고요.
하나님, 나를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나를 알아주십시오라고요.
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기도인지요.
이 기도는 마지막에서 뜻밖의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철저히 개인적인 고백으로 이어졌던 시편이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끝맺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자신만의 고통을 토로하던 시인이 이제는 민족 전체의 구원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결국 공동체를 품게 되는 순간입니다.
참된 기도의 성숙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괴로웠지만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님을 아는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처럼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한 구원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기도는 그래서 결국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타인의 구원을 향한 연대로 확장하는 것.
그때 기도는 더 이상 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편을 더 이상 ‘그의’ 기도가 아닌 ‘우리의’ 기도로 읽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울고 기다리는 이 기도는 곧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 때 여전히 그분을 우러러볼 수 있는가.
우리의 영혼이 갇혀 있을 때 구원을 외칠 수 있는가.
시인은 그 길을 걸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시편 25편은 과거의 노래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기도이며, 내일의 소망이고, 무너질 듯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는 하나님의 대답 없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응답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구원 안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