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은 어떤 흑백 드라마의 파편이 있었다.
드라마인지 뉴스인지 헷갈릴 만큼 무겁고 답답한 화면이었다.
그게 '몽실언니'였다는 걸 이번에 책을 다시 읽으며 비로소 알아차렸다.
다 큰 어른이 돼서 다시 꺼내든 책은 그저 동화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동화라 부르기엔 너무 잔혹하고 무자비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이야기를, 이런 구조를, 이런 결말을... 왜 '동화'라고 부르는 걸까.
이건 도리어 동화의 탈을 쓴 냉정한 시대 고발서에 가깝지 않나?
몽실이는 착하다.
너무 착하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착하다.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을 해친 어른들까지 이해한다.
이쯤 되면 종교적 순교자에 가깝다.
그런데 이게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동화’라니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다.
아니, 오히려 묻고 싶다.
도대체 그 시절의 어린아이는 정말 이렇게까지 ‘완벽한 수동성’으로 살아갔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나?
나는 몽실이를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의심한다.
너무도 온전하게 침묵하고 너무도 완벽히 인내하는 이 아이에게서 불편함을 느낀다.
그건 권정생이 설계한 이상적 ‘존엄성’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현실의 아이들을 대표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권정생의 윤리’를 경계하고 싶다.
그가 지닌 도덕의 무게는 의심할 바 없지만 때때로 그 윤리는 너무 단단해서 숨이 막힌다.
“고통은 견뎌야 한다”, “불행을 이겨내는 게 존엄이다”라는 메시지는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데 유효하지만 그게 반복될수록 독자는 도리어 무기력해진다.
무너뜨릴 수 없는 체제와 그 안에서의 묵묵한 저항은 문학적으로 아름다울지 모르나 현실의 정치적 선택지로서는 의심스럽다.
진짜 몽실이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똑같이 침묵하고 양보하고 버틸 수 있었을까?
또한 이 책이 끌고 가는 구도—고통, 인내, 수용, 용서—는 지나치게 ‘예정된 구도’다.
마치 독자를 일방적으로 이끌고 가는 도덕극을 보는 것 같다.
변주가 없다.
누구도 부정하거나 이탈하지 않는다.
사람은 비겁하고, 분노하고, 도망치고, 배신한다.
그런데 '몽실언니' 속 세계에는 그런 인간적 결락이 거의 없다.
그건 동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동화라면 더욱 그런 모순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몽실언니'가 너무 ‘정상적 윤리’를 중심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역행한 보수적 문학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비판 속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건 몽실이라는 존재 자체가 품고 있는 순전함이다.
그건 이상이 아니라 체념의 깊이에서 비롯된 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가가 그려낸 몽실은 ‘현실 아이들’이 아니라 ‘현실에 짓눌린 어른들’이 갈망한 구원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아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아이 같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자책문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더 아프다.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더 아프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책장을 덮는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고 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무언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쉽게 느껴졌고 또 이 책을 비판한다는 것이 너무 벅차게 느껴졌다.
권정생은 이 작품을 통해 삶의 진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실이 언제나 정의로운 건 아니다.
때론 그 진실이 너무 거대해, 개인의 감정은 눌려버린다.
'몽실언니'는 그런 책이다.
절망을 다루면서도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끝끝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아니, 어떤 두려움도.
과연 우리 시대의 아이에게 이 책을 어떻게 건넬 것인가.
“버텨라”, “인내해라”, “받아들여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물어봐라”, “거절해라”, “저항해라”라고 말하고 싶다.
몽실은 위대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굳이 그렇게 위대해지지 않아도 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어른들은 몽실에게서 위로받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숨 막힐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몽실언니』를 고전으로 받들기보다는, 살아 있는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우리가 정말 이런 식의 윤리를 후대에 물려줘도 되는가, 라는 물음으로. 몽실은 여전히 절뚝이며 앞으로 걸어간다. 그 뒤를 누가 따라갈 것인지, 누가 멈춰 설 것인지, 이제는 우리가 결정할 차례다.
그렇다고 '몽실언니'가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이 건드린 것이 단순한 동정심이나 감상이 아니라 내면 깊은 윤리의 층위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히 건드리지 못한 ‘무기력의 정체’를 몽실이는 끝내 보여준다.
그것은 체념일 수도 있고 용기일 수도 있으며 혹은 복잡하게 얽힌 그 둘의 기이한 동거일 수도 있다.
나는 몽실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좋아한다’는 말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몽실을 의심하고 때로는 부정하며 끝내는 슬퍼한다.
몽실은 존경할 수 있지만 사랑하기는 어렵다.
이 감정은 의도된 것일까?
권정생은 그런 인물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건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버린 독자의 감정의 과잉일까?
몽실은 단순히 고통받은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구조의 증인이고 체제의 목격자이며 무엇보다도 부조리한 윤리를 그대로 살아낸 증여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침묵은 하나의 선언처럼 읽힌다.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의미가 되는 드문 존재.
하지만 그 선언은 지금의 시대와는 어딘가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 침묵보다는 말하기를, 수용보다는 거절하기를, 견딤보다는 바꾸기를 배우고 있다.
그렇기에 '몽실언니'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은 다시 살아난다.
시대의 요청과 어긋나면서 그 어긋남을 통해 또 다른 윤리를 되묻는다.
이 책은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한 어떤 미덕들—인내, 용서, 헌신—이 정말 지금도 유효한지를 시험하는 문장이다.
그래서 나는 '몽실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읽게 된다.
읽고 또 읽고, 아이들에게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건넬지도 모른다.
과연 건네야 하는 책인가, 아니면 다른 언어로 새롭게 써야 하는가.
그것은 독자인 내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문제다.
이 책은 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는다.
어쩌면 진짜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정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몽실언니'는 그런 의미에서 완성된 문학이 아니라, 미완의 문학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이고 끝나지 않은 해석이며 끝내 다가가지 못한 존재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미완의 문장을, 그 어설픈 결론들을 붙들고 있다.
그러니 이제 몽실에게 되물어야 한다.
너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았느냐고.
그 침묵은 진심이었느냐고.
너를 바라보며 위로받은 어른들의 감상은 너에게도 유효했느냐고.
우리가 붙들고 있던 그 많은 윤리들이 사실은 너에게 닿지 않았던 것은 아니냐고.
나는 아직 그 질문을 끝내 묻지 못한 채,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