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의 노래 중에서 헤비메탈의 시초라고 불리는 곡이 뭔지 알아?’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음악의 깊은 물줄기를 따라가 본 이라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끝내 이 곡의 제목을 입에 올릴 것이다.
Helter Skelter.
이름부터가 불온하다.
정돈된 리듬, 감미로운 화성, 맑고 영롱한 멜로디로 세계의 대중을 사로잡은 그 비틀즈가 이토록 거칠고 소란스러운 곡을 만들었다니?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이질감, 그것이야말로 이 곡이 품은 에너지의 실체다.
“정말, 이게 비틀즈야?”라고 되묻게 되는 순간, 이미 우리는 그들의 낯선 궤도에 발을 들인 것이다.
비틀즈는 팝의 정중앙을 걷다가도 느닷없이 옆길로 새곤 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길을 만들어갔다.
팝을 걷다 사이키델릭을 걸치고 중세풍 바로크로 돌아섰다가 어느새 육중하고 황폐한 록의 협곡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 선회는 전혀 무계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철저히 의도된 방향전환이었다.
중심에는 폴 매카트니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 멜로디를 사랑했고 동시에 그 멜로디를 부수는 쾌감에도 매혹된 인물이었다.
Helter Skelter는 그런 충돌에서 비롯된 결과다.
출발은 단순했다.
더 후(The Who)의 ‘I Can See for Miles’가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더러운 곡”이라는 평을 받는 걸 본 폴은 웃었다.
그렇게까지 시끄럽다고? 그럼 내가 보여주지.
그의 머릿속엔 이미 어떤 불순물이 돌아다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곧바로 스튜디오로 들어가 가능한 한 가장 난폭하고 무절제한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Helter Skelter는 세상에 나왔다.
기타는 날이 서 있었고 드럼은 내리꽂혔으며 보컬은 목청이 아니라 영혼을 쥐어짜는 듯했다.
그 결과는? 음악이라기보다 고함, 연주라기보다 폭발, 구조라기보다 붕괴였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음악은 듣는 이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끌어당긴다.
그 이유는 혼돈 속에 녹아 있는 질서 때문이다.
그 질서는 소리의 반복, 리듬의 끈기, 보컬의 날것 속에 숨은 섬세한 통제력이다.
그래서 Helter Skelter는 그저 시끄러운 곡이 아니라 예술의 한 형태로 남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소음의 층 사이에 감정의 실핏줄이 지나간다.
외형은 파괴지만 그 속은 절묘하게 설계된 감정의 복도.
우리가 헤비메탈이라고 부르는 장르의 원형이 바로 이곳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제된 분노, 계산된 광기, 극단으로 밀어붙인 생명력.
이 곡은 분명 록의 강을 건넌 다음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이 곡의 첫 형태가 느릿한 블루스였다는 사실이다.
처음 녹음된 버전은 27분이 넘는 연주였고 아직 전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1996년 ‘Anthology 3’에서 들을 수 있다.
비틀즈가 녹음한 곡 중 가장 긴 트랙.
그만큼 그들은 이 곡에 무언가를 걸었다.
실험이자 도전이자 투쟁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그 육중함 속에는 이 곡을 향한 집요한 탐구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러나 세상은 이 곡을 전혀 다른 맥락에서 기억하기도 한다.
미국의 사이비 교주 찰스 맨슨이 이 곡을 인종 전쟁의 암호로 오독했고 ‘Helter Skelter’는 '살인의 사운드트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물론 이는 곡에 대한 왜곡이며 곡 해석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지만 동시에 이 곡이 얼마나 강력한 이미지와 에너지를 품고 있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광기 어린 오해도 결국 이 곡의 파장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곡의 마지막에서 터진다.
"I got blisters on my fingers!"
링고 스타의 이 외침은, 단지 우스꽝스러운 애드립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의 체화, 예술의 물리적 피로, 감정의 육체화다.
연주가 그 정도로 격렬했다는 방증이자 그 순간 비틀즈는 밴드가 아니라 집단적 분출 그 자체였다.
더 놀라운 건 폴 매카트니의 존재다.
많은 이들은 존 레논을 거칠고 폴을 부드러운 사람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건 반의 진실이다.
폴은 ‘Oh! Darling’, ‘I’m Down’ 같은 곡에서도 이미 맹렬한 보컬을 선보인 바 있다.
Helter Skelter는 그 모든 에너지의 정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바늘처럼 찔렀고 기타는 도끼처럼 휘둘러졌다.
이건 흉내가 아니라 진짜였다.
진짜 록이었다.
이 곡은 그렇게 사람들의 통념을 무너뜨렸다.
비틀즈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Helter Skelter는 그 질문에 “끝이 없다”고 대답한다.
음악사에서 이 곡은 종종 헤비메탈의 원형(prototype) 중 하나로도 언급된다.
물론 블루 체어의 'Summertime Blues',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 레드 제플린의 초기 곡들 또한 같은 범주로 함께 거론되며 Helter Skelter가 ‘유일한 시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이 장르의 흐름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 곡은 단지 장르의 기점이 아니라 비틀즈라는 이름이 음악사에서 왜 전무후무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화석이다.
이들은 어떤 장르든 흡수했고 어떤 형식이든 넘어섰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진심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도 이 곡은 무대에 오른다.
특히 2018년 폴 매카트니가 이 곡을 부르는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흔을 넘긴 노장이 여전히 불붙은 록커의 혼을 품고 Helter Skelter를 외쳤다.
음악이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걸 그 순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노래는 늙지 않는다.
음악은 살아 있다.
그래서 이 곡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
마침표는 없고 쉼표만이 남았다.
우리는 그 쉼표 너머를 기다린다.
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비틀즈는 아직도 유효하며 Helter Skelter는 여전히 우리 귓가에서, 혼돈과 열정의 언어로 세상을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