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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 Man's Moody Blues

by 참지않긔


"혹시 이 노래 아시나요? Poor Man’s Moody Blues."





처음 이 제목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묘한 울림이 남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블루스라니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고, 동시에 흥미롭죠.

그런데 그런 ‘쌈마이’ 감성의 표면 밑을 들여다보면요, 의외로 복잡하고 또 묵직한 울림이 있습니다.

이 제목은 '가난한 사람의 블루스'라는 한국식 직역이 아니라 '짝퉁 무디 블루스'라는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이 노래는 영국 밴드 Barclay James Harvest, 줄여서 BJH의 대표곡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멈춰볼까요.

‘대표곡’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본국인 영국에서는 이 곡, 그다지 대표로 쳐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더 사랑받았죠.

옛날 라디오를 통해 들은 적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기억의 커튼이 살짝 들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Poor Man’s Moody Blues".

이건 단지 우연히 떠오른 조합이 아니었습니다.

꽤 노골적인 반격이죠.

그 배경엔 하나의 조롱이 있습니다.

어느 음악 평론가가 BJH를 향해 "저건 그냥 짝퉁 무디 블루스(Poor Man’s Moody Blues)잖아"라고 말한 겁니다.

이게 그들에겐 꽤나 불쾌하게 들렸겠죠.

밴드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존 리스는 그 말을 곱씹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 아주 정제된 방식으로 음악에 담아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반응의 방식이에요.

대부분의 밴드라면 무시하거나, 인터뷰로 반박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음 앨범에서 변신을 시도하겠죠.

그런데 BJH는 아주 담담하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그 조롱을 껴안아 버립니다.

아예 그 조롱을 곡 제목으로 가져오고 무디 블루스의 대표곡 의 구조를 살짝 빌려온 뒤 완전히 다른 감정과 결로 노래를 재창조합니다.


결과적으로 생겨난 이 노래는 얼핏 들으면 유사한 궤적을 갖는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무디 블루스의 것이 ‘낭만적인 우울’이라면 BJH의 이 곡은 ‘체념을 품은 진심’에 가깝달까요.

익숙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 곡의 정체성, 그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진폭이 이 노래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BJH라는 밴드에 대해서는 한 번쯤 조명이 필요합니다.

이름부터가 독특하죠.

Barclay, James, Harvest.

클래식 작곡가 이름 같기도 하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세 단어가 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사실 이 밴드 이름은 종이에 여러 단어를 적어 놓고 무작위로 뽑아서 정했다고 해요.

그렇게 어쩌다 나온 이름이지만 묘하게도 입에 붙고 기억에 남습니다.


1966년 영국 올드햄에서 결성된 BJH는 두 개의 밴드가 합쳐져 만들어진 밴드입니다.

이들은 당시로선 꽤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했죠.

오케스트라와 밴드 사운드를 결합한 심포닉 록. 아름다우면서도 구조적으로 복잡한 음악.

문제는 그 아름다움이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겁니다.


녹음 때마다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와 함께해야 했고 공연도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음악은 훌륭했지만 제작비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결국 음반사는 등을 돌립니다.

매니저도 떠나고 밴드는 벼랑 끝에 몰립니다.

진짜 Poor Man Band가 된거죠.


하지만 BJH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1973년 새로운 음반사인 폴리도르와 계약하며 방향을 틉니다.

오케스트라를 내려놓고 순수 밴드 사운드에 집중한 거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앨범 입니다.

이 앨범은 평단의 인정을 받았고 특히 라디오 DJ 존 필로부터 큰 지지를 받으며 BJH의 재도약을 알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악명 높은 평가가 등장합니다.

BJH를 두고 “짝퉁 무디 블루스”라고 한 말.

어쩌면 그건 영국 특유의 냉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단순한 평가를 넘어서 아티스트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게 존 리스는 한밤중 호텔 방에서 무디 블루스의 'Nights In White Satin'을 반복해서 들으며 곡을 씁니다.

마치 ‘그래, 네가 그렇게 말했지? 그럼 내가 진짜 보여줄게’라는 듯한 태도로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 감정이 고스란히 곡의 분위기로 번역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단순한 반격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해석, 자전적 진술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곡이 수록된 앨범 'Gone to Earth'는 그 제목처럼 모든 것이 사라진 뒤 남은 본질에 대한 선언 같기도 합니다.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독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유독 사랑받았습니다.

참 묘하죠.

본국에선 소외됐던 음악이 먼 나라 사람들의 감정을 두드린다는 것.

음악이 국경을 넘는다는 말, 그건 이럴 때 실감나죠.


이제 곡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죠.

바로 가사입니다.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했었던아름답게 빛나던 당신의 눈...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나 봅니다.”

이런 문장은 아주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단지 과거의 연인을 회상하는 가사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속엔 훨씬 더 복합적인 감정이 들어 있어요.

후회, 체념, 여전한 애정.

그런데 이 감정을 어떤 격정도 없이 담담하게 풀어낸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

갈등의 원인이 '친구들'이라는 점입니다.

“당신의 친구들이 나를 설득하려 해도그들은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이지만그들이 내 마음을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는 못해요.”


사랑에서 가장 무력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런 때죠.

연인과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제3자의 목소리에 의해 관계가 흔들릴 때.

그때의 무력감은 어떤 분노보다도 더 오래 남습니다.

이 노래는 그 비극을 너무나 덤덤하게 그러나 뼈아프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담아낸 방식이 너무나 성숙하다는 점에서 이 곡은 단순한 실연의 발라드가 아니라 일종의 ‘성명’처럼 읽힙니다.

“그래, 우리를 무디 블루스 짝퉁이라 불렀지. 하지만 이건 우리의 방식으로 만든 진짜야.”


흥미로운 건 실제로 무디 블루스의 저스틴 헤이워드가 이 곡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BJH의 멤버 레스 홀로이드조차도 “우리가 이 곡을 반드시 해야 하나?”라고 고민했을 정도였다니 그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곡은 BJH를 가장 널리 알린 곡이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무디 블루스’보다도 이 곡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요.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음악이라는 게 늘 그렇게 예상과 다른 방향에서 꽃피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곡이 단순히 평론가를 향한 반격이었다면 어쩌면 이 노래는 역사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음악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죠.

그리고 그 맥락은 1980년 베를린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1980년 여름, BJH는 유럽 투어 중 독일 베를린에서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곤란에 빠집니다.

팬들의 요청이 빗발치고 결국 이들은 서베를린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단 한 번의 무료 공연을 하게 됩니다.


그 공연에는 약 17만에서 25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건, 이 공연의 사운드가 장벽 너머 동베를린까지 울려 퍼졌다는 점이에요.

실제로 많은 동독 시민들이 장벽 근처에 몰려와 공연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지죠.

이건 음악이 실제 장벽을 넘은 아주 드문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 실황은 <A Concert for the People (Berlin)>이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 15위를 기록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 공연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바로 이 곡 <Poor Man’s Moody Blues>였죠.


그 순간, 이 곡은 더 이상 짝퉁 무디 블루스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국경과 이념, 장벽을 넘어선 하나의 메시지였고 위로였으며 사랑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노래는 조롱을 담아 만든 곡이지만 결국은 진심으로 환원된 노래입니다.

비아냥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그 예술은 역사의 장면 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소리 없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 흘러들어가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다릅니다.

처음 들을 땐 비슷해 보이지만 다시 들을수록 결이 다릅니다.

정서의 깊이가 음악의 층위로 이어지고 그 층위는 시간을 통과해 ‘기억’이 됩니다.


결국 이 노래는, 하나의 질문처럼 남습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조롱을 노래로 바꾸었는가.’

그리고 바로 거기에 이 노래의 진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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