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267. 라 바니에
작년 가을에 느닷없이 발매된 바닐라 홍차인 라 바니에. 마침 일본에서 루피시아 매장을 방문했는데 발매기념 한정 일러 캔이 있길래 일단 집어왔다. 조금 이르긴 해도 겨울에 밀크티나 잔뜩 해 먹자는 생각으로 달달한 차 구비. 작년엔 크리스마스 시즌차를 사지 않을 생각이었어서 굉장히 빨리 마실줄 알았고 이후에 평범한 봉지로도 나왔길래 추가구매까지 했다. 근데 다음주가 뭐 입춘이라고? 조금은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바닐라라고 하면 가향홍차 중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아이템이기도 할 텐데 그간 루피시아에 바닐라가 없었나요? 그럴 리가. 얼핏 기억하는 것만 해도 정확히 바닐라라는 차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아마도 폐번되고 새로 리뉴얼된 상품인 것 같다. 역시나 프랑시아께서 또 제목을 불어로 지어놓으셨다. 라 바니에, 바닐라 차라는 거죠 뭐. 한정 일러 캔입 50g 1580엔, 일반 봉입 1200엔으로 싸지 않은 금액이다. 상미기한은 제조 2년. 얼른얼른 마셔봅시다.
바닐라 빈과 꽃이 그려진 엘레강스한 한정 일러 캔. 한정 일러로 나온 건 9월인가 그랬고 11월 말인가 12월에 일반 패키지로 발매. 한정 일러 봉투 버전도 팔았었는데 그건 구매하지 않았다. 그 버전을 구경하시려면 따로 검색하길 바라며. 재밌는 게 한정 일러 캔의 상세설명과 일반 봉투의 상세설명이 조금 다르다는 것인데 일반 버전이 좀 더 간략하게 적혀있는 것 같다.
한정 일러 버전은
카오리 유타카나 마다가스카루산 부루퐁 바니라. 소노 텐넨 유라이노 카오리오 스킷토 시타 아지와이노 코우챠니 마토와세마시타. 키힌 아후레루 카오리타치노 죠우시츠나 바니라 티.
향이 풍부한 마다가스카르산 부르봉 바닐라. 그 천연 유래의 향을 깔끔한 맛의 홍차에 입혔습니다. 기품 있는 향이 감도는 상질의 바닐라 티.
이렇게 되는데 간략해진 일반 패키지에는
마다가스카루산 바니라노 텐넨 유라이노 카오리오 젯타쿠니 부렌도시타 코우챠. 키힌 타다요우 죠우시츠나 바니라 티.
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의 천연 유래의 향을 사치스럽게 블렌드 한 홍차. 기품이 넘치는 상질의 바닐라 티.
이렇게 나와있다. 이러나저러나 내용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마다가스카르산 부르봉 바닐라를 사용하여 좀 더 고급진 블랜딩으로 리뉴얼 한 제품인 듯하다. 깔끔한 맛의 홍차라고 해서 뭔 얘긴가 했더니 실론 CTC를 사용했다고 한다. 실론 바닐라야 워낙 많은데 딱히 새로운 도전으로 보이진 않는다. CTC를 사용한지라 레시피는 일반적인 홍차 레시피에서 시간만 30초가 빠진다.
봉투를 열면 루피시아의 '그것'이 없다. 바로 휘발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인 것 같은데 향을 크게 들이마시면 바닐라 익스트렉트와는 다른 신선한 바닐라의 향이 느껴진다. 여기에 실론에서 나는듯한 풋풋한 건초향이 산미처럼 함께 향을 내서 그야말로 천연의 느낌이다. 건엽을 덜어보면 정말 깨알 같은 CTC들에 일단 충격. 진짜 모래알 같다. 여기에 바닐라빈이 조각으로 들어가 있다. 이게 바닐라빈이 몇 조각이 들어있는지가 좀 관건일 것 같은데, 바닐라빈이 들어가서 우러나는 팟과 바닐라빈이 없는 팟이 맛이 꽤나 다를 것 같단 말이지. 건엽의 향을 맡아보면 가향이 그리 강하게 들어가진 않은 것 같고 상당 부분 바닐라빈 조각에 의존하는 느낌이다. 50g 안에 바닐라빈이 몇 조각 들었을지, 그걸 이븐 하게 잘 나눠서 우리는게 핵심이지 싶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예상.
우선은 스트레이트로 시작해 본다. 6g 찻잎을 100도의 300ml 물에서 2분 우려낸다. 향이 퍼져나가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옅은 바닐라향이 마치 초코향처럼 풍겨 나온다. 근데 뭔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던지 이런 대놓고 달달초코바닐라와는 다르게 단맛을 감췄달까. 한 모금 마셔보자. 고양이혀인 나로서는 김 펄펄 나는 갓 따라낸 상태에선 조심스레 후룹후룹 마실 수밖에 없는데 이때는 상쾌한 실론위주의 맛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정직한 차 맛이 나고 찻물에 녹아있는 바닐라향은 의외로 옅다. 실론티의 민트가 딱 느껴지니까 좀 당황스럽다. 그냥 진한 바닐라향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정말 flavored 가향이 아니고 blended 느낌이다. 바닐라빈이 좀 많이 들어가면 향이 진해질까 싶어서 서너 조각 몰빵 해서 넣어봤는데 차를 이기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게 그렇게 뜨거운 물에 뿔린 바닐라빈을 꺼내서 눌러보면 까만 씨들이 쭉쭉 나온다. 좀 더 팔팔 끓이면 향이 진해지겠지. 그나저나 실론 CTC가 이렇게 깔끔하고 맛이 있던가? 의외의 발견이다.
그런 것으로 살펴볼 때 이 차의 용도는 사실 로얄밀크티로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진하게 우려서 우유를 부어주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으나 이쪽은 깔끔한 맛이 돋보인다지 무려 마다가스카르 바닐라빈이 돋보이는 건 아니어서 아무래도 아쉽다. 밀크팬에 14g 정도의 찻잎을 팍팍 넣고 살짝 가열하다가 약 100ml의 물을 부어 2분 이상 강불에서 충분히 졸여준다. 250ml의 우유를 부어주고 약 중 불에서 다시 3분쯤 가열하여 뜨끈하게 온도를 맞춰주었다. 설탕이니 대체당 따위는 넣지 않았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바닐라빈이 충분히 끓어서 검은 씨들이 둥둥 떠다니는 게 보일 텐데 홍차향과 바닐라향이 충분히 녹아있는 데다가 무슨 호주 우유인가를 썼더니 식감 자체가 좀 크리미 해져서 단맛을 전혀 첨가하지 않았는데도 굉장히 달게 느껴진다. 좀 더 직관적인 맛이 아무래도 더 어필하겠지만 라 바니에의 컨셉은 고급진 느낌이구나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맛과 향이다. 여기서 취향에 따라 평이 많이 갈리겠다 싶은데 최근 한국의 밀크티 열풍이 달게! 진하게! 를 추구하는 느낌이라 살짝 엇박자를 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달지 않게 자체의 향을 충분히 느끼는 쪽이 좋았다.
우리고 나서 바닐라빈이 보이면 한 번씩 씹어보고 버리는 습관이 생겼는데 사실 저 조각 자체를 씹는 것보다는 검은 씨만 짜내서 맛을 보는 게 더 맛있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너무 귀찮고 그냥 껍질째 질겅질겅 씹어보다가 버리곤 한다. 바닐라를 씹으면서 뜬금없지만 바오밥 나무를 생각한다. 마다가스카르를 지켜주는 어머니. 이 바닐라도 어머니 바오밥이 길러냈을까. 바오밥 나무의 씨앗은 해류를 타고 멀리 호주까지 이동했다고 하던데, 그리고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은 인도네시아를 거쳐 배를 타고 아프리카 방향으로 돌아온 폴리네시아인들이라고 하던데, 그 길에 있었을 스리랑카 섬이라던지 바닐라 중에 가장 유명하다는 마다가스카르 바닐라로 생각이 다시 돌아오면 어머니 바오밥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순환. 아마도 자연 그대로의 고급스러운 향을 즐긴 뒤라 그런 것 같다. 매우 만족스러웠던 뻔하지 않았던 바닐라 홍차. 라 바니에,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