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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을 지운 다는 건 엄청난 내공이지

쇼교쿠엔 - 우지차 교쿠로

by 미듐레어

이번에도 일본에서 마트를 돌아다니다가 주워온 녹차이다. 일본차 감정사, 무려 최고위 10단이신 소바야시 유 선생님께서 감수한 우지차 교쿠로. 일단 농림수산대신상을 수상했다는 딱지가 붙어있길래 믿고 사 와봤다. 아저씨가 뭔가 신중하게 제다를 하고 계시잖나. 실제 읽을 수 있는 한자는 가운데 우지차 교쿠로, 농림수산 뭐 상 받음 정도지만 표지만으로도 알 수 있는 고급차의 기운. 아저씨 포스 자체가 오소독스 하다. 그리하여 뭔가 포스 있는 교쿠로구나 싶어 주워왔다. 80g이나 들어있는데 1200엔밖에 안 한다구! 일단 가심비가 좋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미기한은 25년 1월 언젠가로 그리 길지는 않은 편이다. 걱정 마세요 이미 다 마심.

으음~ 교쿠로

상옥원이라고 읽을 수 있는 교토의 쇼교쿠엔. 1827년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하는데 그런가 보다 싶다. 일단 뭐 상도 받았고 전문가님이 사진까지 떡 등장해 주셨으니 믿어보자. 심지어 뒷면은 감정서로 본인피셜 검수 완료임을 적어뒀고 다른 설명은 생략했으니 그야말로 간지폭풍. 다른 정보는 레시피로 60도 물을 사용할 것을 이야기하면서 끝. 교쿠로라고 하는데 별 다른 설명 필요 있겠나. 그래, 마셔보도록 하자.

살짝 과자처럼 느껴지는

봉투를 열자 녹차의 고소한 향이 진하게 난다. 최근 증청녹차의 고소한 향을 자꾸 맡다 보니 뭔가 과자향 같기도 하고. 매번 이런 종류의 향을 기름지다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어쩐지 과자기름냄새의 느낌을 자꾸 느껴서 그런가 보다. 어쨌거나 건엽을 덜어내니 제법 반들반들한 교쿠로가 한가득 들어있다. 어디까지나 이쪽도 가성비에 점수를 주고 사온 교쿠로이다 보니 언젠가 보았던 값비싼 교쿠로처럼 균일한 찻잎들의 느낌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꽤나 정갈하다. 박스 없이 봉투로만 포장되었는데도 잎의 상태도 부스러짐이 많지 않아 보여서 만족스럽다. 사진 속의 선생님께 따봉 한번 드리면서 본격적으로 마셔보도록 하자.

무슨 양갱이더라

교쿠로의 경우엔 물을 팍 식혀서 미지근한 물에서 투차량을 확 늘리고 1분 내로 우리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안내에 60도를 사용하라고 나오길래 투차량을 많이 잡아 물 10ml당 1g 가까이 넣어주었다. 정확한 g수가 안 나온다는 건 적당히 털어서 넣었다는 이야기. 100ml당 8~10g 사이가 되도록 적당히 넣은 것 같다. 나물의 익힘 정도가 그래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인 거 같은데 교쿠로 치고는 증제를 좀 세게 했나 보다. 아닌 게 아니라 미분도 좀 있다. 그렇다고 뭐 후카무시 느낌으로 연약한 친구는 아닌 것 같고. 그 사이 어디쯤 되지 않을까? 별 다른 코멘트는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짐작해 본다. 차 맛이 특이하게 인상이 흐릿한 편이라 시음기를 적기가 참 힘들었는데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맛있는데 기억이 흐릿하다. 왜 처음 만난 사람이 예쁘고 잘생겼지만 다음날 얼굴 기억 잘 안나는 그런 느낌말이다. 목이 칼칼하도록 우마미가 진한 상태에서 달달한 맛과 은은한 풀내가 나는 첫 탕을 지나 부드럽게 맛과 향이 녹아들어 간 비단결 같은 두 번째 탕 슬금슬금 물맛이 나기 시작하는 세 번째 탕을 마시는 동안 꽤나 만족스러운 맛과 퀄리티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지나면 맛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경험이라 맛을 기록하는 입장에선 꽤나 까다로운 차였다. 너무 제너럴 한 느낌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 부분이 오히려 누군가에겐 좋은 느낌일 수도 있겠다. 무엇하나 도드라지지 않는 일반적인 맛.

엽저를 보면 평소보다 살짝 더 익은 느낌

괜히 10단 고수가 아닌 것 같다. 인기척을 모두 지웠지만 뭐 하나 부족하지 않고 합격합격합격인 마실 때 만족감이 느껴지는 차를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놀라운 가성비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냥 밋밋한 교쿠로였다는 이야기를 뭐 이렇게 장황하게 하나 싶겠지만 이것은 실력이 없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렇게 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짜 고수들은 때론 평범함을 연기하곤 한다. 하지만 완벽한 평범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그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것을 해낸 맛있는 교쿠로 쇼교쿠엔의 우지 교쿠로였다. 다음에 저 사진이 보이면 또 사 와야지.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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