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이닝 프리미엄 빈티지 다즐링
최근 홍차 마시는 사람들을 다시 접하게 되면서 놀라게 된 점 하나가 바로 트와이닝의 변해버린 위상이다. 좋은 쪽은 아니고 나쁜 쪽인데 다들 트와이닝을 너무 최저가 쌈마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나마 레이디 그레이는 먹을만하지 않아요?" 하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었는데, 얼그레이의 근본이요 본가인 트와이닝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게 좀처럼 믿기 어려운 나는 그저 옛날 사람일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딱 하나의 블랜딩을 뽑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트와이닝의 퀸마리를 뽑을 텐데 이미 그런 시절은 잊힌 지 오래이고 사람들에겐 일명 트다즐로 놀림받는 브랜드가 되어있었다. 트와이닝의 티백 시리즈가 티백맛이 많이 나고 아무래도 분쇄도가 높은 편이라 평이 좋기는 물론 어렵겠으나 짧은 시간으로 충분한 양만 잘 우리면 얼마나 가성비가 넘치는데. 저가티백만 찍어내는 회사도 아니고 말이다. 억울함이 많던 차에 일본 마트를 지나다가 운명처럼 트와이닝의 프리미엄 라인 틴케이스를 발견했는데 무려 빈티지 다즐링. 이봐 친구들, 트와이닝의 다즐링이 뭔지 내돈내산으로 보여줄게. 아마도 1398엔으로 50g 들었다. 상미기한은 27년 6월로 어지간한데 제조 3년이 아닐까 싶다. 꽤 기네.
트와이닝 프리미엄이란 건 처음 보는데 검색해 보면 대부분 일본어 페이지만 떠서 아마도 트와이닝 재팬에서만 판매하는 라인업이지 않나 싶다. 이외에도 얼그레이(사옴), 프린스 오브 웨일스, 레이디 그레이가 있는데 마트마다 가지고 있는 물량이 제각각인 듯. 일단은 보이는 상품인 다즐링과 얼그레이만 사 와봤다. 틴 모양만 보고 당연히 금색 뚜껑을 따면 스팸 통조림처럼 두꺼운 은박 뚜껑을 뜯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은박봉투가 들어있었다. 프리미엄 라인은 뭔가.. 다르네? 하하핫. 틴케이스 디자인 자체는 너무 옛날 그 디자인 느낌이라 낚였다.
가위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따고 향을 맡아보니 다즐링의 바싹 마른 건초향이 신선하게 올라온다. 바삭바삭 크리스피하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신선한 건엽이 풀내보단 난향에 가깝게 올라오는 한없이 가벼운 향이다. 건엽을 덜어내니 제법 큼직한 잎들에 롤링조차 되지 않은 연둣빛의 잎들도 섞여있다. 아마도 퍼스트 플러시를 살짝 섞은 세컨 플러시 위주의 블랜딩 같다. 얼핏 봐도 밥차로 딱 좋을 비주얼이다. 살짝 가격 있는 밥차. 줄기도 듬성듬성 있는 게 대충 느낌인지 격식을 벗어난 맛에 집중한 느낌인지 헷갈리는데 마셔보는 수밖에.
오늘은 여유 있게 90도까지 물을 식혀서 2분간 우려 보기로 한다. 찻잎은 6g, 물은 300ml을 사용. 사실 이래저래 시도해 봤는데 온도를 크게 타지는 않는 것 같다. 건엽을 봤을 땐 온도 꽤나 타게 생겼는데 생각보다 관용도가 좋아서 놀랐다. 봤는가, 이것이 근본 있는 회사의 부란도라고 하는 거다. 심지어 시간도 크게는 타지 않아서 다즐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일반적인 홍차 레시피로 우려도 다 비슷비슷하게 나오는 정도. 잔에 따라내 보면 다즐링의 품종향이라 할 수 있는 풋풋한 홍차향과 함께 진하게 찻잎 구운향이 올라온다. 이 구수함은 흡사 호지차의 느낌. 동정우롱이나 호지차에서 느낄법한 바삭하게 구워진 향이 찻물을 따라낼 때부터 넘쳐난다. 혀를 지나 목으로 넘어갈 때까지 보리차스러운 구수함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분명 세컨플러시 위주의 은은하고 옅게 단맛이 도는 밀도 있는 홍차맛 또한 정확하게 느껴진다. 부드러운 맛 뒤에 감춰진 수렴성도 트와이닝 빈티지 다즐링의 매력인 것 같다. 구수하고 부드럽다고 막 들이키면 이내 입이 마르고 목이 마르다. 이건 의외의 발견이다 싶을 정도로 취향저격이다. 이 가격에 이 맛이라면 주력으로 삼아도 아쉽지 않다. 희미하지만 존재감은 확실히 있는 무스카텔까지 갖춰야 할 미덕은 모두 갖췄다.
프리미엄 라인의 빈티지 다즐링은 분명 트다즐이라 불리는 퓨어 다즐링과는 가격면에서나 여러모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다즐링 대비 가격 경쟁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성비 제품으로 추천하고 싶을 정도인데, 이걸 접해보지 못하고 트와이닝을 비웃는 건 그저 본인의 경험이 짧음만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중저가의 가성비 다즐링을 연달아 몇 종류 마시게 될 예정인데 그 시작이기도 한 트와이닝의 프리미엄 라인 빈티지 다즐링이다. 근본의 홍차회사가 내놓은 빈티지의 맛은 아주 훌륭했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