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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렝게티 초원의 코뿔소처럼 찻잎을 뜯으며 묵묵히 간다

루피시아 1742. 아쌈 메렝 FTGFOP1 QUALITY 2024

by 미듐레어

아쌈의 계절은 주로 가을이지만 지난가을이 유독 짧고 바빴기에 메렝을 사두고 이제야 시음기를 적게 되었다. 먹기는 진즉에 다 먹고 시음기용 세이브 조금 남겨둔걸 이젠 청산할 때가 되었다. 메렝이야 워낙 유명한 다원이고 루피시아가 아니더라도 구 할 곳이 많지만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또피시아에서 구매하게 되었다. 메렝 아쌈의 24년 퀄리티에서 기대하는 건 진한 아쌈. 골든팁이 많은 티피아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몰티함을 원한다기보다는 좀 더 꽉 들어찬 아쌈 차맛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구매했다. 사실은 그냥 아쌈라인을 다 산 것 같기도 한데 뭐 아무튼. 30그램 봉입 1500엔으로 상미는 제조 2년. 부동산 이슈로 2년 넘게 쟁이기 어려운 사람은 그냥 당해 소비가 답이다. 넉넉하게 두 팩 구매.

아쌈 메렝그

등급명이 꽤나 길다. FTGFOP1이고 24년 퀄리티. 일단 등급명에서부터 맛있네.

슌라시이 다이치 오 오모와세루 아츠미 노 아루 후우미 토 유타카 나 아마이 카오리 노 앗사무 나츠츠미 코우차. 미루쿠 토노 아이쇼 모 박군 데스.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대지를 떠올리게 하는 두터운 풍미와 풍부한 달콤한 향의 아삼 여름 수확 홍차. 우유와의 상성도 발군입니다.

조금은 당연하게도 밀크티 추천 마크가 붙어있다. 하지만 30g 15000원을 밀크티에 씀풍씀풍 소진할 만큼 아직은 마음이 갑부가 아니어서 스트레이트로만 아껴 마시기로 한다. 대신에 한 번만 마시고 버릴 예정. 어른이 되고 직장인이 된 보람을 이렇게 느껴본다. 그나저나 대지를 떠올리게 하는 두터운 풍미는 뭘까. 아쌈에서.. 대...지?

느껴져? 대지의 기운?

봉투를 열면 앞서의 아쌈들, 그러니까 나호라비나 퀄리티에 비해서 가벼운 향이 난다. 진한 몰트향과 건초향, 그리고 약간의 고소한 향이 나는 건 마찬가지인데 간장뉘앙스는 아니고 옅은 꽃향에 가깝다. 대지의 기운은 꽃향기를 말함인가. 건엽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꽤나 단단한데 대지보다는 나무의 기운으로 느껴진다. 단단한 나무 같은 느낌. 겉으로 향을 내어놓는 느낌이 아니고 어딘가 향을 안쪽으로 움켜쥐고 있는 느낌이라 이거 얼른 우려 봐야겠다.

그렇다. 단풍 물양갱을 곁들이던 지난 가을의 차인 것이다.

늘 우리던 방식으로 6g의 찻잎을 300ml의 100도씨 물에서 2.5분 우려내었다. 찻잎이 꽤나 헤엄을 치는 것이 브로큰 썰린 크기가 작지 않은데도 점핑이 수월하다. 괜시리 기분 좋은 장면. 팟을 옮길 때 고구마껍질 짜낸 것처럼 찐득한 향이 났었는데 한 잔 따라내니 진한 아쌈향이 파도에 햇빛이 반사되듯 언듯언듯 뿜어져 나오고 꽤나 향이 잔 밖으로 나오지 않는 기분이다. 향의 색채가 꽤나 짙은데 차 자체는 굉장히 내향적인 느낌이다. 한 모금 마셔보니 고구마껍질을 모아서 씹는듯한 달달하고 진한 향이 난다. 기존 아쌈을 약간 전홍쪽으로 끌고 온듯한 향이다. 24년 아쌈이 전반적으로 이런 고구마껍질 향이 거의 가향 수준으로 찐득한데 맛 자체는 또 부들부들하다. 천천히 마시다 보면 식을수록 달큰해지는데 수렴성도 같이 올라온다. 어딘가 표현이 씅에 차지 않는 좀처럼 속을 보이지 않는 내향성의 차. 확실한 것 한 가지를 언급해야겠다. 차를 마시면서 이런 종류의 감상은 지양하는 편이지만 여름의 기운을 고스란히 저장했다가 전달받는 기분이다. 저장하고 있는 에너지가 많아서 받아 마시기에 굉장히 에너제틱한 기운의 차라는 뜻이다. 기운이 좀 처지는 오후에 마시면 굉장히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차.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기운이야기는 공유조차 지양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차, 이런 뜬구름 잡는 감상이 아니면 정확한 맛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내향인이라고. 사람으로 만들어 인터뷰를 하지 않는 한 이렇게라도 이해해 보는 게 한계다.

숭덩숭덩 큰 조각

24년의 아쌈 총평은 진한 고구마껍질향, 부드러움, 옅은 품종향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고구마 달달이 아쌈을 수식하는 주요 수식어이긴 하지만 나름의 품종향이라는 게 있는데 어째 올해는 그런 게 잘 안 느껴졌달까. 이렇게 24년 아쌈을 마무리한다.

최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로 글을 쓰기가 많이 힘들었다. 세상이 천천히 모노톤으로 변하더니 형체만 남아 인지되었다가 결국엔 윤곽선만 남기고 하얗게 변해버렸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뭘 먹고 마셔도 맛이나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미리 마셔둔 차들이 많아 기억에 의존하여 글을 쓰고 있다. 단 5g, 10g씩이라도 세이브를 남겨두기도 해서 최대한 기억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되게끔 하고 있다. 비로소 조금씩 회복이 되고 있으니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계속하여 나가보려 한다. 그래서 나에게 아쌈이란 뭘까. 처음 느낀 다원차요, 황금의 구수함이며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차 같은 것이다. 해가 지나 연초인데 비록 작년의 기억이라도 태양의 뜨거움으로 나를 깨워주는 듯 한 아쌈 메렝 퀄리티. 기운 내보겠음.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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