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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Aug 14. 2023

영국사람도 아니면서 문득 여왕님을 떠올릴 때가 있다.

Fortnum & Mason - Jubilee

요즘 들어 정말 영국사람처럼 차를 마시고 있는데 남은 차가 약 200g이고 보부상님께 차를 전달받으려면 그래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 같아서 급하게 차를 들여오기 위해 고터 신세계를 방문했다. 신세계에서 슬슬 포트넘 접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주요 상품들이 250g짜리만 남아있었고 앞으론 작은 사이즈는 안 들여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애초에 데일리 티가 필요해서 갔기 때문에 주빌리를 구입하는 걸로 결정은 되어있었는데 언제나 200g부터는 구입하기가 좀 쫄린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먹고 갔던 거고 비 오는 날 사람도 북적이는 식품관에서 얼른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구매를 했고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붙이도록 하겠다. 아무튼 주빌리 250g 구매.

250 대용량 두둥

주빌리는 기념식, 축제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구약시대의 주빌라떼, 희년이 어원이다. 희년에는 노예가 풀려나고 빚도 청산되고 죄인도 사면하는 대대적인 리셋이 이루어졌는데 7년씩 7번이 지난 다음 해, 즉 50번째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었다. 어원이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특별한 몇 주년을 기념하는 느낌으로 사용한다.

포트넘 앤 메이슨의 주빌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맞아 출시된 차로 이름에서부터 여왕을 위해 헌정된 블랜딩이다. 포트넘엔 왕과 왕실에 관련된 블랜딩이 많으나 그건 차차 기회가 된다면 다른 시음기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아무튼 엘리자베스 여왕 관련된 블랜딩으로는 10년 넘게 잘 팔리고 있는 주빌리가 앞으로도 스테디셀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음엔 좀 더 성의있게 찍어보겠습니다.

인도, 스리랑카, 중국의 차를 블랜딩 한 노블한 차라고 하는데 미리 답을 맞혀보자면 아쌈, 기문, 실론의 조합이다. 중간중간 노란색으로 보이는 건 아마도 아쌈의 골든 팁이라고 생각된다. 주빌리 상품 설명에 밀크 넣으면 맛있다고 되어있는데 건엽의 향 자체가 벌써 밀크티를 부르는 향이다. 아쌈 골든팁 자작하게 삶아서 우유 넣고 한번 더 끓이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참을 수 없는 아쌈 기문의 단내가 난다구요.

대왕 초코크로와상. 스트레이트에서는 좀 더 가벼운걸 페어링 하시길.

5g, 300ml, 2.5분. 제법 진하게 우려냈다. 호로롭. 진하다. 카멜리아 시넨시스 아싸미카! 홀리몰리. 마시면서 뒤에 있는 이것이 기문인가 운남인가 갸웃갸웃 하면서 마시긴 했는데 아무래도 티피아쌈에 기문이지 않을까 정리했다. 아쌈 기문의 깔끔하면서 단맛이 도는 느낌에 실론이 뒤에서 받쳐주는 느낌이다. 정말 신기한 게 진한 맛과 향에 비해 수렴성이 정말 적다. 같은 왕실 블랜딩인 퀸 앤이나 로얄 블랜드였으면 벌써 혀가 반토막이 났을 것이다. 앤 여왕님이 아쌈 베이스에서 시이이이이이로오오오ㅗ오온 한다면 주빌리는 기무우운 한 느낌이다. 퀸 앤의 묵직하고 정갈한 느낌과 주빌리의 진하면서 시원한 느낌의 차이. 333으로 조금 더 연하게 해도 맛이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조금 더 섬세하게 테이스팅이 가능하긴 하다. 달달한 향이 좀 더 올라온다거나. 아이스에서도 데일리 티라는 느낌의 부담 없는 미덕이 잘 살아나는데 세련되고 기품 있는 블랜딩이라는 점이 잘 느껴진다.

진한 밀크티라면 어떨까. 뭘 어떄 좋지.

12g, 300ml, 3분. 우유는 120ml를 따뜻하게 해서 섞어준다. 진한색의 밀크티가 나왔다. 우유의 고소함을 해치치 않고 홍차의 맛과 향도 살아난다. 이쯤 되면 솔직히 비율도 뭣도 없고 그냥 어떻게 끓여도 맛있는 차다. 범용성 최고.

실론은 뭐가 들어간걸까요. 오렌지페코쯤?

포트넘의 차들이 다 그렇지만 어딘가 정색하고 본격적인 느낌이라 개인적인 농도 조절이 좀 중요하겠지만 진하면 진한대로 연하면 연한대로 이렇게 팔방미인 다 잘 어울리는 홍차는 흔하지 않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60주년 주빌리는 단순히 장수의 미덕뿐만 아니라 제국주의가 끝나버린 21세기까지 영연방을 유지하고 영국의 국모-혹은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역사를 기념하기도 한다. 포트넘의 주빌리는 그런 의미에서 먼 조선의 어떤 아저씨가 영국사람마냥 매일 홍차를 마셔대며 이렇게 저렇게 차를 만들어도 '오오 이것이 여왕의 홍차인가' 하며 그 기품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블랜딩인 것이다. 내가 영국사람도 아니고 군주제 열렬 지지자도 아니고 제국주의자도 아니지만 아무튼 영국문화에 닿아있는 가운데 홍차하면 할머니 모습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유는 영국의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이렇게 서로 엮여있으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입맛에 다 잘 맞기 때문.

군주제가 유지된다면 언젠가는 또 새로운 주빌리가 열릴 것이다. 그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부디 포트넘에서 이 블랜드를 단종하지 말고 '퀸 엘리자베스'로 이름을 바꿔 계속 내줬으면 한다. 그런 의미로 추천곡은 50주년 골든 주빌리 행사에서 God save the Queen을 연주하는 Queen의 브라이언 메이와 피처링 로저 테일러. 그리고 여왕님이 티타임을 갖는 플래티넘 주빌리 기념 영상도 남긴다. 나는 어째서 영국사람도 아니면서 이렇게... 아무튼 끗.



God Save the Queen - Queen


플래티넘 주빌리 기념영상



시음기를 마치기 전에 이건 꼭 이야기해야겠다. 23년 8월에 구입한 차의 제조가 21년 1월이고 상미는 24년 1월. 앞으로 신세계에서 포트넘을 구매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살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지금 재고 털고 나면 주빌리 더는 안 들여온다는 점원의 말에 좀 큰 사이즈지만 담아 온 건데 - 첨엔 단종이라고 해서 단종이요? 다른 것도 단종되는 게 있나요?라고 했더니 본사 단종까진 확실하지 않으나 한국에 들여오진 않는다고 했다고 정정받음 - 상미기간이 반년도 안 남았다니. 양심 어디? 물론 구매 전에 확인은 구매자가 했어야 하는 것도 맞고 그래서 안 샀을 거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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