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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Aug 14. 2023

내면의 태양으로 꽃 피운 오렌지 블라썸

Fortnum & Mason - Fortmason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던 2020년 가을, 백수였던 당시 당근을 뒤적거리다가 만나게 된 포트넘 앤 메이슨의 포트메이슨. 내가 쉬는 동안 새로 나왔나 보다 이게 뭐야 신기해 이건 사야지 하면서 집 근처에서 직거래. 이후 오 좋군, 하고는 찬장 안에 고이 모셔둔 차를 이제서야 꺼냈다. 100g 조금 안되게 남은 것 같은데 상미기간이 무려 1년 반 지남. 깊이 반성하고 있다. 뒤늦은 시음기.

미안해서 좀 더 힘주어 사진을 찍어보았다

첨엔 샌프란시스코의 포트 메이슨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오렌지 블라썸 가향이고 오렌지 띠를 두른 것도 캘리포니아를 염두에 두었나 싶어서 그랬다. 근데 또 그냥 포트넘 앤 메이슨이란 이름을 변형한 건가 싶기도 하고. 이미 생겨버린 선입견.

다즐링과 기문이 적절히 섞여있다. 검은 것은 기문이요 갈색은 다즐이라. 아마도.

다즐링과 기문 블랜딩에 오렌지 블라썸 가향이 입혀져 있다. 건엽에서 이미 가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오렌지꽃 향이 퍽 고급지다. 자칫 비릿할 수 있는 향이 깔려있는데 난꽃처럼 은은하게 배어있다. 베르가못 같으면서 확연히 다른 향에 코를 박고 킁킁킁하게 된다. 이러면 상미기간이고 뭐고 차가 상합니다. 차를 깨끗하게 관리합시다. 뜨면서 보니까 바스러진 게 꽤 많다.

오렌지와 복숭아의 조합

5g, 300ml, 3분. 수색은 진하지 않고 오히려 노란색에 더 가깝다. 일단 가향이 정말 화사하게 퍼져나간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복숭아와 함께 먹어보면 아침의 활력이 살아날 것만 같다. 한입 호로롭 마셔보면 오렌지 블라썸의 향이 바람에 훅 날린 뒤에 기문의 부드럽고 고풍스러운 훈연향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오렌지 블라썸과 기문의 조화가 훌륭하다. 거기에 다즐링의 베이스가 너무 가라앉지 않게 한 단계 톤을 올려주고 있다. 포트넘 앤 메이슨의 차들은 항상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포트메이슨은 수렴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도 향으로 그 무게를 잡아두었다. 의외로 식후에 바로 마시기에도 좋고 무거운 디저트와도 잘 어울릴법하다. 물론 가벼운 티푸드나 데일리에도 잘 어울린다. 아삭아삭 복숭아와 조합이 참 좋았다. 아쉽게도 스트레이트 핫티 외에는 비추. 밀크티나 레몬티, 아이스티 쪽으로는 차의 맛과 향이 깨져버린다. 그나마 급랭아이스티까지는 그럭저럭. 입안에 잔향이 길게 남아 즐기기 좋다.

소엽종으로 보이는 게 기문일 테고 좀 푸릇하고 칼로 다져놓은 듯한 잎들이 다즐링일 테다. 아마도.

샌프란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하이드 언덕길을 끝까지 달려 내려오면 피셔맨스 워프가 나온다. 내리면 자연스레 공원으로 연결되는데 거기가 바로 Fort Mason이다. 보통은 길을 건너서 피셔맨스 워프로 이동하게 된다. 공원을 따라 들어가면 작은 해변이 나오는데 거기 앉아서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온 적이 있었다.

포트 메이슨

조용한 바닷가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뜨거운 태양아래 잔잔한 파도가 찰랑거리는 한없이 파란 바다와 하늘이 아찔했던 기억이다. 바에 앉아서 마셨던 아이리시 커피 한잔에 긴장이 풀리기도 했고. 한참 마음이 복잡하던 시기였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혼란스럽기도 했고. 얼른 논문 쓰고 대학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은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한편으론 이렇게 끝내는 게 맞는 건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무렵이었다. 그랬던 6월 말의 포트 메이슨은 선선한 바람과 함께 마음을 정리해 주었고 묵묵하게 일어날 힘을 주었었다.

포트넘의 포트 메이슨은 그 미묘한 가향이 일상을 변주해 주는 힘이 있다. 조용하게 큰 에너지를 전달해 준다. 이런 차를 왜 찬장에 묵혔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캘리포니아 오렌지의 상큼 발랄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여름의 조용했던 바닷가가 떠오른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잔잔하고도 눈부셨던 바다가 전해준 에너지. 언덕너머 포트 메이슨.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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