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8573. 크림소다
올 초에는 그랑마르쉐 온라인이 크게 있었고 봄에는 오사카 그랑마르쉐를 다녀왔더랬다. 그래서 올여름에 좀 가열차게 그랑마르쉐 특집으로 시음기를 많이많이 써야지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냥 앉아서 차만 많이많이 마시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서너 개 정도는 대충 사진만 남기고 이미 다 마셔버려서 시음기를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늘은 그랑마르쉐에서 사 온 여러 차들 중에서 그나마 조금은 남아있어서 마셔가며 시음기를 작성할 수 있는 크림소다를 마셔본다. 크림소다는 몇 년 전 그랑마르쉐에 등장했던 한정차로 아마도 카페에 가면 초록색 소다음료에 크림을 올려주는 바로 그 메뉴를 모티브로 하여 만든 가향차이다. 분명 이모티콘 중에서도 그런 이모티콘이 있을 것인데 텍스트로 표현하자니 장황해지는 게 아쉽다. 굉장히 예쁘게 디자인된 라벨지가 붙어있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 연초에 온라인 그랑마르쉐에선 보지 못했던 것 같고 오사카 회장에서 50g 봉입 730엔으로 두 개 구입. 상미기한은 반년으로 의외로 짧다. 가격에 있어서 좀 오락가락하는 면이 있는데 얼마 전 여름의 그랑마르쉐 온라인에서는 가격이 780엔으로 살짝이지만 높은 가격이었고 옛날 자료에 의하면 900엔이 넘는 가격대였던 것 같은데 가격이 싯가야 뭐야.
사 오고 나면 한정인지 뭔지도 모르게 평범하게 생긴 라벨. 아무래도 메모를 보고 기억을 되찾아가며 차를 마시게 된다.
아마이 바니라 아이스 토 메론 소오다노, 사와야카데 하지케루 후우미오 이메에지시타 료쿠차. 아이스티이니 오스스메.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멜론소다의 상쾌하고 톡 터지는 풍미를 이미지 한 녹차. 아이스티로 추천.
여름 그랑마르쉐가 끝나자마자 홈페이지에서도 상세페이지를 내려버렸기 때문에 확인은 어렵겠으나 그럴 줄 알고 미리 저장해 둔 정보에 의하면 말차가 들어가 부드러운 차의 풍미도 느낄 수 있으며 탄산수에 섞어 마시는 어레인지도 추천한다고 한다. 올해 다시 올린 나츠코이 시음기에도 나와있는 탄산수 어레인지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차 10g을 150ml에 우려서 200ml의 찬물과 100g의 얼음, 150ml의 탄산수를 섞는 얼음제외 500ml 상당의 레시피. 어레인지 레시피가 따로 적혀있진 않았는데 아마도 급랭에 탄산수를 타는 이 레시피를 말하는 거지 싶다. 냉침 탄산의 레시피가 따로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봉투를 열어보면 메론소다라고 적혀있긴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향이 난다. 작년인가 라무네 시음기 때도 이야기했었던 그 소다맛 아이스크림의 소다 부분의 향.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그 향이다. 처음엔 그저 라무네 비슷한 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맡으면 맡을수록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크리미 한 향이라서 그런지 풍선껌스럽거나 톡 쏘는 향은 없는 편. 건엽을 덜어내면 녹색의 금평당과 하얀 아라레가 보이는데 마치 멜론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색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렇게 모티브가 되는 원물의 색이나 이미지를 토핑처리 하는 게 루피시아의 특징. 사용된 녹차도 역시나 싸구려의 느낌은 들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을 잠시 미뤄뒀지만 우림 온도나 시간이 기존 가향센차와는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온도를 높이고 시간을 줄이는 건 고급차일수록 그렇게 하는데 나의 개인적인 습관과 비슷한 이유라면 아마도 괜찮은 녹차를 썼다는 뜻이지 않을까. 말차가 들어있다는 설명과는 다르게 그냥 부스러기나 좀 보이는 정도인 것 같은데 우려 보면 다를지 모르겠다.
일단은 루피시아의 가향 센차니까 냉침을 담가보았다. 5g의 찻잎을 500ml의 물에 넣어서 6시간쯤 냉장고에서 우렸다. 역시 라무네와는 다르다 라무네와는. 크림소다는 크림소다. 크리미 하다는 느낌이 더 드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는데 인식 자체가 뽕따, 캔디바가 먼저 떠오르다 보니 소다맛이 강하다고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이쪽은 메론소다를 가향한 거라 파란색의 그 소다와는 또 다를 텐데 거의 척수반사 느낌으로 캔디바 쪽으로 인지가 착 붙어버리는 건 한국인 고유의 감각인 것 같다. 바밤바처럼. 한국에선 크림소다를 소다맛에 더 가깝다고 느끼고 일본에선 라무네를 좀 더 소다맛으로 느끼지 않나 싶은데 이 부분은 좀 궁금하네.
우림법을 생각해 보면 크림소다는 차맛을 빵빵하게 내는 게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인지 급랭을 해보니 차맛이 꽤나 풍미가 좋다. 6g의 차를 100도씨의 물 150ml에서 1분쯤 우리고 얼음컵에 부어서 급랭을 해보니 꽤나 가루가 많이 지는 차가 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미세하게 말차가 들어있긴 들어있는 걸까. 색도 꽤나 진하고 미분도 많은 느낌이다. 맛은 개인적으로는 급랭에 한표. 올해는 하츠코이도 그렇고 뭔가 센차 쪽의 콩고물 같은 향이 좋은 느낌이다. 급랭으로 마실 때 크림소다의 향도 온전히 살아있고 녹차의 풍미도 그대로 느껴져서 마시는 재미가 좋았다. 하지만 제일 재밌었던 건 역시 탄산수를 조금 타서 마신 급랭. 어레인지의 레시피도 좋지만 일반적인 급랭을 만든 뒤에 강한 탄산수를 쪼로록 50ml 정도만 더해줘도 정말 소다의 식감이 살아나는 듯해서 앞서 이야기한 맛과 향까지 더해지면 극강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시음기를 마무리하는 오늘내일이 처서이고 어제는 루피시아에서 가을차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스티로 후루룩 마셔버린 차들이 한 달 새 수백 그람이어서 밀려있는 시음기가 열개도 넘는 것 같다. 글을 써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천천히 즐기자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래도 혀의 기억력이 짧다 보니 새로운 차를 마시기가 겁나고 못 마실 생각을 하니 다시 조바심이 난다. 그러니까 한가로이 꿈빛 파티시엘에나 나올 것 같은 카페에 앉아 크림소다 같은 만화적인 음료를 쭈압쭈압 마시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누가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게 잘 안 되는 답답함. 올해 7-8월 더위는 타 죽고 말라죽을 것 같은 뜨거움이었는데 그런 답답함들이 중첩되어 견디기가 힘들었다. 힘들다는 일기를 여기에 쓸건 아니고 그 와중에 내가 원하던 휴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기시켜 주고 떠올리게 해 주었던 크림소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꿈꾸던 휴식과 답답함과 다시 원하게 되는 휴식의 고리를 순서대로 풀어내려니 어떻게 적어도 앞뒤가 매끄럽지 못하네. 아무래도 나는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크림소다를 마시면서 다시금 절절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신나는 동심의 꿀맛 같은 시간. 어쩐지 크림소다를 사러 가까운 그랑마르쉐를 급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