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655. 허니 레모네이드
작년 겨울부터 쭉 신경이 쓰이던 차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 허니 레모네이드였다. 수많은 계절 한정을 가지고 있는 루피시아가 어떻게 봐도 여름한정일 것만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차를 왜 상시판매하고 있는 걸까. 게다가 홈페이지의 설명을 읽어보면 아이스도 좋고 핫티로도 좋다고 적어뒀다. 이름이 레모네이드인데 핫티로 추천을 한다고? 궁금함을 참을 수 없는 차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구매하지 못했던 차이기도 하다. 그랑마르쉐 한정으로 발매되었다가 2019년에 레귤러로 편입되었다고 하는데 보통 이런 경우는 인기가 검증되기도 했어서 실패확률도 낮다. 그럼에도 구매를 자꾸 못하다가 올해는 여름에 마실 차까지 봄에 미리 다 장만을 해두었는데 아이스티로 마실 차들을 잔뜩 쟁여놓으면서 드디어 함께 쟁여보게 된 허니 레모네이드. 40g 봉입으로 680엔이고 상미기한은 1년.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애매하게 50g이 아닌 40g 패키지이다. 그런 핑계로 두 봉지 구입.
레모네이드에 꿀을 타는 경우가 많이 있던가. 있기야 있지만 시중에서 자주 접하던 허니 레모네이드는 심플시럽을 넣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는 맛이었는데. 루피시아에서 시럽 단맛을 넣고 허니 레모네이드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아마이 하치미츠토 사와야카나 레몬노 카오리가 히로가리마스。 홋토데모 아이스데모 타노시메루 코우챠데스。
달콤한 꿀과 상큼한 레몬 향이 퍼집니다。 뜨겁게도 차갑게도 즐길 수 있는 홍차입니다。
맛자체는 굉장히 간단하게 설명해 두었다. 저 정도는 다시 말해주지 않아도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잖아. 어쨌든 내 눈에 재밌게 보이는 건 저 뒷 문장인데 핫티도 아이스티도 즐길 수 있다니. 그것도 보통은 그러한데 이렇게 강조를 하니까 뭔가 다른 게 있나 기대를 하게 된다.
봉투를 열어보니 의외로 흑설탕에 절여진 레몬청의 향이 난다. 살짝 캬라멜색의 진한 흑설탕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꿀향에 바싹 마른 레몬향이 짙게 느껴지는데 하츠코이 나츠코이류의 생레몬 내지는 레모나 같은 그런 느낌은 아니고 마르고 절여진 그런 종류의 뉘앙스가 강하다. 야생꿀의 종류인 것 같은데 TWG의 Winter palace보다는 프로폴리스 느낌이 살짝 덜하고 달달함이 조금 더 있는 편. 그래도 어쨌든 야생꿀이라서 꿀의 향이 달달함을 일단은 이기는 편. 건엽을 덜어내어 보니 기분 탓일까 약간 나뭇잎 같은 느낌의 메리골드와 두툼한 레몬필이 들어있다. 홍차는 디카페인마냥 검은데 인도와 스리랑카 홍차가 블랜딩 되었다고. 설마 하니 꿀을 먹여서 색이 검게 된 건 아닐 텐데 가향이 꽤나 짙은 지 잠시 스쳐가는 다하에도 향이 묻는다. 그럼에도 휘발성은 전혀 없는 게 꿀향은 에센스류로 입히는 게 아닌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다.
우선은 핫티부터 마셔보기 위해 6g의 차를 100도씨의 물 300ml에서 2.5분 우려내본다. 야생꿀향이 뜨거운 물에 타들어가서 우아하고 달달하던 향이 찌그러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온도를 내리면 또 차 맛이 애매해지는 어중간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일단 그러려니 하고 기다려보자. 한잔을 따라내 보면 여전히 벨런스가 흐트러져있는 듯한 상태인데 여기서 살짝 한 김을 식혀내면 비로소 다시 레몬향이 스윽 피어올라오면서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 쌉쌀함보다는 무거운 파우더 느낌의 꿀향이 느껴지면서 단맛이나 단 향은 꽤나 제거된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상큼한 레몬의 향이 단맛과 함께 침샘 쪽을 때리고 지나가는 마무리. 제법 근사한 역동을 가지고 있는 허니 레모네이드이다. 그 와중에 의외로 수렴성은 적다기 보단 연한 편.
아무래도 여름이니 아이스티를 마셔야겠지. 허니 레모네이드는 건엽을 볼 때부터 생각했지만 확신의 급랭상이다. 이것은 반드시 급랭으로 맛있다고 건엽에 써있어서 냅다 급랭. 냉침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급랭에 비할바가 아니니 따로 언급하진 않겠다. 12g의 차를 100도씨의 물 300ml에 2.5분 우리고 얼음 가득한 피쳐에 따라낸다. 신기하게도 찌그러졌던 야생꿀의 향기가 얼음으로 싹 다려낸 듯 펴지고 건엽에서 느껴지던 향긋 달달함이 차가운 온도에도 불구하고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 뒤로 달달함을 돋구기 위해 살짝 흩뿌린듯한 레몬향이 근사하게 따라오면 여름밤에 고급진 느낌으로 차분하게 한잔하기 좋은 아이스티가 완성된다. 리츄얼 한 찻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어울릴듯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밤마다 급랭으로 퍼마신 결과 변변한 사진을 남기지 못하고 전량 소모해 버렸다. (.....)
역시 그랑마르쉐 한정에서 검증을 받고 레귤러에 진입하는 경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차분해지는 야생꿀의 향에 가벼운 레몬향의 마무리가 제법 고급스러웠다. 꿀향이 들어간 홍차라고 하면 아무래도 인공적인 설탕꿀의 향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제는 진짜 꿀향이 아니면 내려놓게 될 것만 같다. 최근 차가 트렌드가 되면서 앞서 말한 그저 달달한 느낌의 차들도 꽤나 매출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부디 거기서 머무르지 말고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더운 여름밤 장마기간을 포함하여 밤마다 나에게 쉼을 주었던 허니 레모네이드. 내년에 또 만나봅시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