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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Sep 05. 2023

꿈꾸는 꽃향기와 끝이 없는 이야기들의 뜨겁고 차가운 밤

루피시아 5582. 아라비안 나이트

시즌 2를 시작하는 첫 차는 루피시아의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세헤라자드, 알라딘과 함께 일명 아라비아의 여름 트리오 중 하나인 아라비안 나이트. (한국식으로 읽도록 하겠다)

선정 사유: 날이 더 시원해지기 전에 여름한정을 얼른 마셔야겠고 그때가 마침 밤이어서.

그런 이유로 아라비안 나이트를 먼저 꺼내보았다. 역시나 일본 다녀오신 지인 a.k.a. 보부상님의 행낭에서. 6, 7, 8월 석 달만 파는 계절 한정이라 내년에 마셔볼까 어쩔까 하다가 초가을 더위도 무시 못할 것 같은 예감에 구매를 부탁드렸다. 50g 봉입에 680엔.

아라비이안 나이또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를 상상하여, 홍차에 석류와 자스민으로 엑조틱하게 향을 부여했습니다. 과일향의 달콤함과 꽃 향기가 환상적인 풍미를 조성합니다."

최근 일본어 번역은 사진 찍은 뒤에 문자인식으로 텍스트를 복사하고 chatGPT에게 시킨다. 번역 후에는 알파벳으로 읽어달라고 해서 실제 발음등을 다 들어보고 확인한다. 이렇게 하면 일본어 까막눈인 나도 일본어를 직접 읽어보고 내가 아는 일본어와 맞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와 스고이 멧차 뻬라뻬라.

실제는 이거보다 훨씬 알록덜록하고 황홀합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이겠지만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하면 알라딘이나 신밧드, 열려라 참깨등이 생각날 테다. 천일야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뭔가 화려한 비단과 매직카펫 같은 게 생각나는데 그 이미지에 맞게 건엽은 콘플라워, 블루마로우, 로즈레드가 들어간 화려한 색상이다. 약간 레몬 머틀처럼 밝은 초록색, 연두색의 잎도 잘게 컷팅되어 섞여있다. 검은 홍차들 사이로 파랑, 빨강, 형광초록 같은 화려한 색들이 수놓아져 색감에서부터 아라비안 나이트가 느껴진다. 게다가 가향이 정말 오묘하다. 석류와 자스민향이 입혀졌는데 눅진하게 달달한 자스민이라서 신비한 꽃향기처럼 느껴진다. 아랍의 신비로운 꽃향기랄까.

여보, 아무래도 스튜디오를 하나 얻어야 할 것 같아.

아쌈 위주에 간간히 다즐링스러운 잎이 섞여있는 것 같은데 베트남도 들었다고 하니 구분은 못하겠다. 300ml, 5g, 2.5분 우려 보았다. 우리는 내내 꽃향기가 퍼져나간다.

향이 너무 좋아 초코렛은 손도 안댔다.

수색은 짙은 편으로 떫은맛이 걱정되게 생겼다. 하지만 생긴 것에 비하면 평범한 수렴성. 진하게 마셔도 될 것 같은데 꼭 그럴 필요도 없는 게 가향이 정말정말 진하다. 재탕을 해도 티팟 안에 향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맛은 다 빠져나가서 아주 싱겁게 가향만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차는 연하게 향은 강하게. 밤에 마시기에도 적절할 수 있겠다. 가향이 강하다고 해서 차의 맛을 해치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야말로 외유내강, 안에서부터 끝없이 뿜어져 나와 차를 감싸주는 향이다. 자스민 가향이 갖는 힘인 걸까. 참고로 급랭하고 남은 잎을 그대로 냉침한 뒤에 냉침을 마시고 또 남은 잎으로 하루정도 방치해 뒀는데도 엽저를 버릴 때 향이 엄청나게 남아있을 정도였다. 버리지 않고 방향제로 쓰고 싶을 정도로 좋은 향이다. 늘 마시던 심플한 자스민이 아니다 보니 원래 자스민이 어땠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아라비아 이미지로 꺼내본 잔이다. 시즌이 바뀌었는데 사진은 여전히 개판이네.

300ml, 11g, 3분. 얼음 가득한 잔에 서빙해 본다. 비 오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어두운 밤을 바라보며 마셔본다. 얼음이 좀 적었는지 수렴성이 꽤 느껴졌다. 거봐라, 결코 약하지 않은 차라니까. 확실히 한여름보다는 한풀 꺾인 온도와 습도가 오묘하게 달콤한 자스민향과 섞이면서 이렇게 멋진 검은 하늘 위로 나르는 마법 융단을 타고…

엽저가 로맨티끄 무슨일이야

아이스티로 좋은 가향차의 큰 조건은 어느 농도로 만들어도 즐기기 편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라비안 나이트는 어떠한가. 어떻긴 최고지. 늦여름-초가을의 나츠코이로 등극했다. 회사에서도 휘뚜루마뚜루 대충 만들어도 언제나 만족할만한 차가 나온다.

자스민은 의외로 종류가 굉장히 다양한데 우리가 흔히 마시는 자스민차의 그 자스민은 아라비안 자스민이라고 부른다. 자스민이 이렇게 아라비아라는 이미지에 찰떡으로 붙을 줄이야. 여러가지 가향과 함께 정말 독특한 꽃향기가 풀풀 나는 로맨틱한 아라비안 나이트. 늦여름에 딱이지 뭐야. 시기를 잘 맞춘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끗.




시음기에 자주 등장하는 수렴성은 고인물이라서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고 영어로 아스트린젠트(astringent)한 맛을 적절히 번역해서 쓸 말이 쉬운 게 없어서 아쉬운 대로 널리 쓰이는 용어이다. 다른 말로는 삽미 내지는 그냥 떫은맛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표현은 혀가 쪼그라드는 맛이라고 보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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