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이 원래 이렇던가 뭔가 좀 밤티 같은데

루피시아 5673. 몽블랑

by 미듐레어

루피시아의 온라인 그랑마르쉐에서 샀던 차들을 거의 다 마셨다. 의외로 조금 샀네 싶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고 시음기가 잔뜩 밀린 것. 다 마시고 간단한 초안만 끄적여둔 시음기들이 아직도 한참 남아 있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초안 털이 특집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그랑마르쉐 한정인 몽블랑. 계절감이 뭔가 가을이 온 뒤에 마셔야 할 것 같아서 연말로 개봉을 미뤄뒀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 한참 춥던 시기에 밀크티로 신나게 마셔재끼고 시음기는 나 몰라라 한 지가 두어 달. 작년 이맘때 구입했고 50g 봉입 780엔으로 두 봉지를 구매. 상미기한은 제조로부터 1년이다.

만년필

평범한 가향 홍차 라벨이 붙어 있다. 2-3분인 걸로 보아 CTC 위주의 차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밀크티에 어울릴 수밖에 없는 맛이라 그런 듯.

코-바시이 마론쿠리-무토 나마쿠리-무가 제츠묘-니 초-와시타 몬부란오 이메-지。미루쿠니 요쿠 아우 코-차데스。
고소한 마롱 크림과 생크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몽블랑을 이미지. 밀크에 잘 어울리는 홍차입니다.

이래저래 몽블랑이라는 이름에 충실한 블렌딩인 것 같다. 설명도 그냥 딱 그런 느낌.

봉투를 열어보면 미약한 휘발향과 함께 CTC 특유의 시원하달지 쏘는 듯한 향이 느껴진다. 가향 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섞여서 분간이 잘 안 된 걸지도. 어쨌든 두텁고 달달한 마론 가향을 기대했다면 조금 의외일 수 있는 느낌. 몽블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진한 밤 크림 향이라기보다는 좀 더 담백한 인상이다. 건엽을 덜어내어 보면 인도 CTC 위주의 찻잎에 노란 아라레가 박혀 있어서 밤의 껍질과 속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분명 마른 밤 조각도 들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밤 조각은 잘 못 찾겠다. 아라레에 가려졌나. 이것 또한 회색의 크림 덩어리인 몽블랑의 이미지와는 좀 다른 것 같아서 나의 좁은 식견을 탓할 뿐이다. 내가 모르는 몽블랑의 세계가 있겠지 뭐.

바밤바

우선은 스트레이트로. 6g의 찻잎을 300ml의 끓는 물에 2분 우려낸다. 차를 따라내면 밤을 럼 따위에 조리다 못해 진득하게 잼이 되어버린 듯한 냄새가 난다. 건엽에서는 안 느껴지던 향이 물을 만나니 화악 피어오른다. 달고 쌉쌀한 향이 워낙 진하기 때문에 확신의 밀크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의외로 입안에서는 가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편이다. CTC 특유의 맛이 가향을 눌러버리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몽블랑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국수 같은 가느다란 크림 가락이 잔뜩 쌓여 있는 크림 부분의 맛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차는 그 아래의 빵과자 부분의 향을 두텁게 깔고 그 위로 크리미한 느낌은 오히려 은근하게 마무리 지어주는 느낌으로 올라가 있다.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부분이랄까. 마론 크림이 듬뿍이라는 홈페이지 설명에 비해 스트레이트로는 좀 억눌린 느낌이다.

우유부어 당장

역시나 이 차의 진면목은 우유를 부어주었을 때 나타난다. 베이스의 CTC가 우유와 잘 어울리면서 움켜쥐고 있던 힘을 풀어주니까 이제서야 몽블랑의 가향이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스트레이트에서는 빵과자 베이스에 억눌려 있던 크리미한 마론 향이 우유를 만나니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마론 크림과 생크림이 조화된 몽블랑이라는 홈페이지 설명이 밀크티에서야 실현되는 셈. 라벨에서 밀크티를 추천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이오이 믿고 있었다구.

의외로 중기스러운 찻잎이 많았네

갈수록 확실한 킬러 상품만 레귤러 라인에 올리는 듯한 루피시아. 그런가 하면 디카페인이나 인퓨전 쪽은 일단 품목을 늘리고 보는 듯도 보인다. 이런 추세로 보아서는 뭔가 확실하게 인기 상품이다 싶은 게 아니고서는 이벤트 한정에서 레귤러로 올라오는 상품은 없을 것 같다는 느낌. 몽블랑이 딱 그 정도인 것 같다. 맛있게 마셔놓고 강짜부리는 느낌이지만 최종으로 올라갈수록 어려워지는 기준이라는 게 있으니까. 허긴 레귤러가 될 정도면 진즉에 되었겠다. 그래서 마실 필요 없어요? 라고 물어보면 이게 또 그 정도는 아니구요. 시즌에 한 번 정도 맛은 보고 지나갈 정도는 됩니다랄까. 허긴 그래서 이벤트 상품에 딱 맞기도 하다. 즐거운 가을 축제, 가을의 그랑마르쉐에 어울리겠다 싶은 몽블랑,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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