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699. 타키비
추분이 지나면 루피시아에서는 해가 짧은 시즌에만 판매하는 계절 한정을 판매하기 시작하는데 재작년에 리뉴얼이 좀 된 걸 모르고 맛이 달라졌네 하면서 지나가다가 시음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모두 소진해버렸다. 그래서 작년에 다시 시음기를 좀 쓰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늦어져서 벌써 연도가 바뀌고 말았다. 밤 녹차의 시음기를 쓴 게 몇 달 전이니까 이거 참, 맥락이 딱 끊겨버렸네. 어쩐지 매년 하나씩 나눠서 쓰게 되어버린 가을차 리뉴얼 시리즈 마지막. 타키비는 50g 봉입 950엔으로 상미기한은 제조일로부터 1년. 이제 밤이 더 기네 싶은 시기부터 그래도 아직은 밤이 더 길지 하는 시기까지만 판매한다.
패키지만 봐서는 어디가 바뀐 건지 한눈에 알기는 어렵다. 늘 그렇듯.
망고-야 파숀후루-츠노 카오리오 노세타 우-롱차。타키비오 오모와세루 코-바시이 후-미와 리락쿠스타이무니。
망고와 패션프루츠의 향을 더한 우롱차. 모닥불을 생각나게 하는 고소한 풍미는 릴랙스 타임에.
고소한 풍미라니, 아무래도 정산소종의 풍미를 좀 더 강조하는 듯하다. 수선에 대해서 고소한 풍미를 이야기하기는 좀 어색한 것 같다. 훈연 정산소종을 사용했다면 진짜 모닥불의 불 느낌이 강하게 나기야 하겠지만 거기까지 가면 호불호가 강하기도 하겠고 망고와 패션후르츠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연한 사실이라 미리 스포하자면 비훈연 정산소종을 사용했으니 걱정하지 말 것.
봉투를 열어보면 달달한 풍선껌 향이 묘하게 차분한 마음을 갖게 한다. 크게 팍 쏘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그래도 꽤 진한 가향이다. 향은 이렇게 여름에 마실 법한 과일주스 느낌이지만 우려내면 겨울에 딱 어울리는 묵직한 차라는 게 이 타키비의 매력이지. 건엽을 덜어내어 보면 바싹 마른 우롱차 잎들 사이로 빨간 사플라워와 노란 마리골드가 섞여 있다. 빨간 사플라워가 모닥불의 불꽃 같고, 노란 마리골드는 불티가 튀는 것 같고, 갈색빛 찻잎들은 장작 느낌이랄까. 이전 버전에서 마리골드만 들어 있던 것에 비해 사플라워가 추가되면서 시각적으로도 훨씬 모닥불다워졌다. 찻잎도 수선으로만 구성되어 있을 땐 뭔가 백차 느낌이 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홍차 같은 모양.
딱히 바리에이션으로 마실 이유가 없으니 6g의 찻잎을 300ml의 끓는 물에 1.5분 우려낸다. 우려내는 동안 열대과일 가향이 코끝을 스치는데, 이전 버전과 마찬가지로 망고와 패션후르츠의 트로피컬한 향이 뭉근하게 퍼져간다. 찻물 한 모금 마셔보면, 열대과일 가향은 여전히 화사하게 앞으로 치고 나오는데 정산소종 특유의 육즙이 가득한 중국 홍차에서 나오는 감칠맛이 더해져서 이전보다 확실히 두터운 맛이 되었다. 이전 버전이 수선에서 나오는 연한 암운과 배화향에 열대과일 주스를 첨가한 듯한 느낌이었다면 리뉴얼 버전은 정산소종의 묵직함이 베이스에 더해지면서 트로피컬한 가향이 가볍지만은 않게 끌어내려지는 느낌이다. 사실 24년에 막 리뉴얼되었을 때 한참 정산소종이 맛있었던 해인지라 이번 시즌의 배치가 작년만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있는데, 그때 기준으로 하자면 이전 버전과 비교할 게 아닌 잘된 리뉴얼이었다. 지금은 좀 취향에 따라 다를 것 같은 느낌.
타키비, 분서갱유 할 때 그 분자를 쓰는 불사를 분, 불 화를 더한 한국식으로는 분화라고 읽는 모닥불. 그런 단어에는 캠핑에 어울릴 것 같은 마시멜로나 구황작물 같은 게 떠오르기 마련인데 열대과일인 망고와 패션후르츠 가향의 차라는 점에서 예전부터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차였다. 그런데 막상 마셔보면 또 기가 막히게 겨울에 어울리는 차라서 인상 깊은 차이기도 하다. 뜨끈한 열대과일 음료가 겨울밤 캠핑장에서 어울리는 무엇일 수 있다니. 이제는 맛도 그렇고 시각적인 부분까지 더욱더 모닥불에 걸맞은 차가 되었다. 다 떠나서 수선과 정산소종이라면 장작불에 어울리지 않을 수 없지. 뜬금없는 조합의 완성도가 리뉴얼을 통해 업그레이드되고 나니 마법처럼 느껴지는 타키비,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