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751. 펠리시타시옹!
루피시아에서 모모우롱 다음으로 프로모션을 많이 하는 차가 바로 메르시 밀포아인데 아무래도 감사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차이다 보니 연중무휴 각종 패키지로 발매가 된다. 그만큼 스테디셀러이기도 한 메르시 밀포아의 짝은 오랜 기간 코토부키라는 미라벨 가향의 대만 우롱차였는데 이것의 키워드는 바로 축하. 코토부키도 충분히 인기가 좋고 프랑스스럽게 미라벨 가향을 엄청 진하게 해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메르시 밀포아와 짝을 좀 더 맞추고 싶었는지 재작년쯤 새롭게 발매한 것이 펠리시타시옹이다. 구매는 한참 전에 했는데 딱히 축하할 일이 없어서 일 년 넘게 묵히고만 있다가 더는 안 되겠어서 폭풍 소비.
펠리시타시옹은 프랑스어로 축하합니다라는 뜻으로 영어의 Congratulations와 정확히 대응된다.
피-치야 체리-노 아마즈잇파이 카오리니 이로토리도리노 하나비라。오메데토-오 이미스루 코코로 하나야구 코-차데스。
복숭아와 체리의 새콤달콤한 향에 형형색색의 꽃잎. ‘축하합니다’라는 의미를 담은, 마음이 화사해지는 홍차입니다.
백도가 아니고 피치라고 되어 있는 게 좀 신경 쓰이긴 한데 백도와 베리류의 조합인 메르시 밀포아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가향 조합이다. 형형색색의 꽃잎이 토핑되어 있다는 것도 메르시 밀포아와 겹치는 부분. 아무래도 짝을 맞추고 싶었던 모양.
봉투를 열면 푱 하고 튀어오르는 가향. 복숭아향과 체리향이 섞여서 쨍하지 않은 세리지에 같은 향이랄까. 확실히 백도 가향보다는 조금 더 진득한 황도의 느낌이 있긴 한데 이게 체리향에 섞인 백도 같기도 하고. 애초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으니까. 전체적인 가향의 인상은 역시 메르시 밀포아랑 비슷한 결을 가지고 간다. 건엽을 덜어내 보니 크지 않은 홍차엽과 린덴, 로즈레드, 콘플라워, 마리골드가 토핑되어 있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메르시 밀포아의 히스플라워의 역할을 대신하는 게 린덴인 것 같은데 일단 린덴이라고 하면 평화와 사랑의 꽃으로 유명하니까 또 의미가 남다르겠다. 나 같은 경우엔 괴테라든지 슈베르트 생각나면서 비극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긴 하는데 원래는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갑자기 괴상한 축하가 될 뻔했군. 잊으세요. 헷.
평소처럼 6g의 찻잎에 끓는 물 300ml를 부어 2.5분 우려내었다. 화려하게 발산하지 않고 다구 안으로 머금어지는 향이다. 건엽에서의 화려한 부케의 이미지와는 다른 소박한 느낌의 따스함이다. 백도와는 미묘하게 다른 조금은 무거운 톤의 복숭아 가향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오히려 베리류에 더 가까운 체리 가향이 아주 옅게 지나간다. 찻물은 부드럽지만 목 뒤로 넘기고 나서 수렴성이 붙는 편으로 부드러운 것에 비해 어떤 다식을 곁들여도 쉽사리 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야말로 범용 홍차라는 느낌. 화사한 느낌을 원한다면 따뜻하게 마실 때보다 급랭으로 차갑게 식혔을 때 그 매력이 배가되는데, 얼음 위로 뜨거운 찻물을 부어 순식간에 식혀내면, 뭉근하던 과일 향이 쨍하게 살아나며 청량한 축배를 드는 기분이 든다. 마치 샴페인을 터뜨리듯, 시원하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펠리시타시옹 한 잔. 축하할 일이 없는 날에도, 이 차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나 자신에게 작은 축하를 건네는 기분이 든다. 냉침은 비추인 게 체리 가향이 워낙 앞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냉침을 했을 때 다른 모든 향들이 죽고 거의 세리지에와 가까운 체리체리한 가향차가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그것도 좋은 향이고 맛있기는 하지만 그럴 거면 세리지에를 마시는 게 낫지 않나. 아니다, 펠리시타시옹이 계절 한정이 아니니까 대용으로 쓰는 방법도 있긴 하겠구나.
아무래도 축하할 일이 없는 날이 계속되고 바쁘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마음 편히 쭉 쉴 수 있지도 않은 지리한 날들의 반복 속에서 차를 마시는 것만이 낙이었던 기간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차를 마시는 것도 어딘가 무감각해지고 지치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언젠가는 이제 타의로 차를 더는 못 마시게 된다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한 날들도 있었다. 다시는 함께 차를 마실 수 없는 시간으로 접어드는 생각. 그 긴 터널 속에서 축하의 차를 꺼내는 건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최근에는 건강도 다시 챙겨보려 하고 앞으로도 차를 계속 마시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챙겨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한 번쯤 축하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시음기를 쓰는 내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에반게리온의 신작 소식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오메데토 하면 에반게리온 아니겠냐고. 에바에서의 오메데토 또한 정확히 이런 맥락이었지. 모든 칠드런에게, 펠리시타시옹,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