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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Sep 07. 2023

첫사랑의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루피시아 8515. 하츠코이

탕비실의 고인물 시즌 1에서 브런치 업로드가 아니라 시음 기준으로 첫 번째 차는 루피시아의 여름 한정차인 나츠코이였었다. 진한 레몬사탕 같은 나츠코이는 단순한 가향을 넘어 홍차의 맛까지 레몬을 넣은 것처럼 순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세한 건 시즌 1의 나츠코이편 참고. 나츠코이가 홍차 베이스로 만든 여름 레몬가향이라면 이번에 마셔볼 차는 일본녹차 베이스의 하츠코이. 이름만 봐도 형제관계라는 게 느껴진다. 나츠코이와 하츠코이는 세트상품으로도 팔았던 것 같은데 홈페이지 캡처해 둘걸. 나츠코이도 하나 더 할까 하다가 여름 끝물에 여름 차 너무 많이 사는 것 같아 하츠코이만 보부상님께 부탁드렸다. 50g 봉입 830엔.

하츠코이. 뒷면이 빼곡하다.
그리이인레몬 노 카오리 또 레몬구라수 오 미도리싸이 니 부랜도시따 나츠 겐테이차
그린레몬의 향과 레몬그라스를 녹채에 블렌딩 한 여름한정차

녹차블랜딩이다 보니 1.5분~2분으로 나와있다. 물 온도는 열탕이지만 알아서 60~70도 사이로 사용하는 게 좋겠다. 특이한 점은 뒷쪽에 있는 상미기한인데 2023.11월까지로 되어있다. 아래에 평소 못 보던 깨알 같은 문구를 읽어보면 풍미가 섬세한 애들이 많아 상미가 반년이고 가향 특성상 은박봉지 쓰는 게 좋을 것 같으며 개봉하고 얼른 드시라고 되어있다. 사실 나츠코이에도 붙어있는 경고인데 루피시아의 레몬가향이 좀 빨리 날아가는 듯. 나중에 알았지만 하츠코이는 나츠코이와 비교해도 향이 정말 빠르게 날아가기 때문에 경고를 잘 읽어두도록 하자. 하츠코이. 밀봉에 밀봉. 매우 중요.

라벨엔 녹차가 아니라 녹채라고 되어있다. 채소라는 건데... 이것은 마른 샐러드?

개봉하자마자 화사하게 레몬향이 퍼진다. 한참 코를 박고 흡입해 본다. 정신 차리고 건엽을 살펴보면 일본녹차에 레몬그라스가 부추마냥 들어가 있고 레몬필이 섞여있다. 구성자체는 그야말로 심-프르. 천연의 레몬필과 레몬그라스에서는 날 수 없는 압도적 레몬향은 가향의 힘이겠지.

되도록 구멍 미세한 스트레이너를 사용하도록 하자.

라벨에는 150ml에 3g이 적당하다고 나와있어서 11g, 300ml, 1.5분, 70도로 우려서 얼음컵에 부어보았다. 역시 너무 진하다. 녹즙까진 아니고 주스. 그 와중에 일본녹차 특유의 맛과 레몬가향이 아주 공격적이지는 않다. 좋은 맛과 향이지만 향수를 인중에 실수로 뿌린 느낌이라 부담스럽다. 남은 찻잎에 다시 물을 부어 500ml 냉침을 해봐도 여전히 진하고 향이 깊다. 진할수록 좋겠다는 느낌은 아니어서 다음부턴 내 입에 연하게 평범하게 내려보는 걸로.

고운 스트레이너를 써도 가루가 많이 나온다.

따뜻하게 마시기에는 150ml, 2g, 1.5분, 65도가 좋았다. 혀에서는 전형적인 일본 녹차의 구수한 맛과 레몬그라스의 적당한 허브가 느껴지는데 코에서는 향긋달달한 레몬향이 화악 지나간다. 일본 녹차의 그 곡물맛 같은 구수함이 아주 빠방하면서 레몬 껍질을 곱게 갈아 제스트 뿌려놓은 듯한 향이 아주 일품이다. 70도, 2분으로 재탕을 우려도 여전히 유지가 된다. 3탕째는 맛도 향도 그닥.

나름 깨끗하게 내리는데에 성공. 수색이 옅어지지 않는 범위에서 연하게 우리는게 아이스로는 딱.

급랭 레시피는 3g, 150ml, 1.5분, 70도에 얼음 170g 이상으로 넉넉하게 넣어주는 게 좋았다. 다시 한번, 베이스가 기대이상으로 좋다. 단순히 레몬가향 녹차라고 하기엔 베이스의 녹차가 완벽히 차별화를 이루어낸다. 루피시아의 레몬가향은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고. 아이스티의 경우 재탕부터 이미 조오오금 연해지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재탕까지 하면 버리는 게 맞겠다.


하츠코이는 냉침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냉침에서는 녹차보단 레몬그라스의 맛이 더 살아난다. 레몬향은 급랭보단 미세하게 더 좋은 편. 녹차베이스의 숭늉 같은 맛을 좀 더 원한다면 급랭으로, 그저 깨끗하고 깔끔한 맛을 원한다면 냉침이 더 좋겠다. 냉침의 경우 재탕은 좀 어려웠다. 5g, 400ml, 냉장고에서 하룻밤.

그것은 초련

나츠코이가 '하연' 그러니까 여름의 연인, 인연이었다고 하면 하츠코이는 '초련' 즉 첫사랑이다. 뭔가 국민 첫사랑 수지 같은 아련한 그런 느낌보다는 좀 더 강렬한 낙인과도 같은 이미지가 있는 이름이다. 물론 한국에서 초련이라고 하면 다들 팔을 돌리면서 난 그냥 좋았어 니 앞에만 서면 오레오레오레오 떼창이 나오겠지만. 그런 이름의 녹차 블렌딩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말차 같은 진한 무엇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츠코이를 마시면서 뭔가 이미지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차, 앞서 이야기했듯 가향이 정말 빠르게 날아간다. 개봉하고 3~4일 됐을 즘엔 가향이 반 이상 날아가버려 너무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엽저에 코를 박는 순간 납득이 되는 지점이 있었다. 젖은 레몬그라스의 쌉싸레한 향과 아마도 녹차에서 나는듯한 풀내음. 화려하고 향긋하고 풋풋한 레몬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난 뒤에 남은 진득한 초련의 향이었다. 에쿠니 가오리가 이야기했던 '사랑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 떠오르는 향이 남아있었다. 이제야 미련 없이 레몬사탕 같은 가향을 떠나보내면서 내년을 기약해 본다. 하츠코이,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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