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8294. 얼그레이 자포니카
작년 겨울에 느닷없이 '자포니카'라는 지극히 품종명스러운 이름을 달고 나온 얼그레이가 있어 구매해 보았는데 여차저차 하다 보니 상미기한인 연말에 임박해서야 마셔보게 되었다. 자포니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일본풍의 느낌은 딱히 착각은 아닌 것이 쌀과 장어의 품종명으로도 쓰이는 이 단어는 극동 지역의 자생종들을 일본이 잽싸게 종명 등록하면서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얼그레이에 붙이는 자포니카라니. 설명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의 녹차를 베이스로 일본에서 기른 베르가못을 사용한 얼그레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래, 일본의 것이 맞지. 일본은 귤 품종도 워낙에 다양하고 전국에 많은 품종의 농가들이 분포해 있는데 일부 지역에서 최근 기후 위기로 생산량이 자꾸 감소하자 아싸리 기후에 맞춰 베르가못을 재배해 보기로 했나 보다. 이런 쪽에선 상당히 적극적인 루피시아가 고치현에서 기른 베르가못을 사용하여 일본의 오리지널 얼그레이를 만든 모양이다. 당연히 생산량이 많지 않은 모양이고 가격도 거기에 맞춰 30g 봉입으로 1530엔이니까 상당한 가격이다. 마침 올해 신년이 되자마자 아내가 후쿠오카에 갔길래 안심하고 심부름을 시켜 두 봉지 구입.
유자도 청귤도 아닌 그림이 그려져 있는 디자인 라벨이 붙어 있는데 아마도 국산 베르가못을 그려둔 거지 싶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한정 일러스트 캔은 발매가 되질 않았는데 티백조차 발매되지 않은 걸로 봐선 아무래도 생산량 이슈인 듯하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제법 특별한 차이기 때문.
키쇼오나 코쿠산 베루가못토노 호오코오오 마톳타, 료쿠차노 와세이아아루구레이. 조오힌나 카오리가 키와다츠 사와야카나 후우미.
희소한 국산 베르가못의 향을 입힌 녹차 베이스 일본 얼그레이. 고급의 향기가 돋보이는 상쾌한 풍미.
얼그레이의 수식어로 상쾌하다는 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슬쩍 스쳐가는 이미지가 있으니 바로 시즈오카 녹차. 아마도 감칠맛보단 은은하게 단맛이 나는 개운한 느낌의 녹차를 사용한 게 아닐까 싶다. 자세한 건 뜯어보면 알겠지.
봉투를 열어보니 기존 얼그레이보다 조금은 더 밝은 톤의 시트러스가 훅 올라온다. 뭔가 시원하다는 느낌. 레몬과는 또 다른 결로 시원 상쾌한 느낌이 있는데 쿨민트 계열의 향이 코로 들어올 때의 촉감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시트러스인데 시트러스 아닌 듯한 새로운 감각이 신선하다. 그래서 베르가못 향과 다르냐고 묻는다면 또 베르가못이 맞긴 한데. 신기한 향에 재밌어하며 건엽을 덜어내자 의외로 꼬불꼬불 말린 모양의 찻잎이 나온다. 자세히 보니 덖은 녹차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정보를 찾아보니 이제 새로 생산되기 시작한 일본산 베르가못의 향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전용으로 새로 만든 덖음차라고 한다. 이쯤 되면 가격이 좀 납득이 되기 시작한다. 보통은 센차 베이스였던 루피시아의 베르가못 가향 녹차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라벨에 나와 있는 우림법에 맞춰 한참 식힌 80도 이상의 물 300ml에 6g의 찻잎을 상투법으로 부어주었다. 우림 시간은 1.5분. 얼그레이 베르를 우렸을 때 센차 특유의 유향 같은 게 좋았었는데 베이스의 차이겠지만 녹차 자체의 향보단 베르가못 향이 지배적인 인상이 찻물을 따라내면서 느껴진다. 여튼 얼그레이 녹차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진단 말이지. 한 모금 마셔보면 걱정과는 다르게 얼그레이인데도 유자를 쓴 듯한 사뿐한 느낌이 든다. 보통의 얼그레이가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벳핑상은 베르가못이 너무 진해서 아찔한 느낌이 들 정도이고, 얼그레이 베르는 꽉 찬 베르가못에 꽉 찬 녹차 맛이 입안 가득 볼륨감 있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는데 얼그레이 자포니카는 녹차도 베르가못도 굉장히 경쾌한 느낌이다. 녹차가 아니더라도 보통 얼그레이라고 하면 꽤 무게감이 느껴질 거라는 선입견 같은 게 있을 텐데 덖음차에 밝은 톤의 베르가못을 우아하게 입혀놔서 한결 편안한 느낌이다. 온도에는 조금 민감한 편인지 뜨거운 물로 거칠게 다뤄주면 약간 탄 듯한 느낌이 나서 좋지가 않고 아이스에도 딱히 어울리지는 않는다. 잔에서 잘못 식어도 어딘가 비어 있는 공간에서 비리다는 느낌이 날 때도 있지만 온도만 잘 맞추면 녹차와 베르가못 모두 편안하게 풀어져서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해준다.
프로토타입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성공적인 블렌딩이 아닌가 싶다. 연말인데 올해는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완성하는 데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 의미 있는 블렌딩이고 특색도 있긴 했지만 다른 비슷한 블렌딩과 비교하면 역시 가성비는 좀 떨어지는 편이라 가격 경쟁력에 있어서 여러모로 고민은 해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일본 차의 비전을 계속해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감탄스럽다고 해야 하나. 정말 멋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에도 이런 회사들이 많이 생겨서 차 산업을 이끌어나가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백의 미가 있는 편안함, 얼그레이 자포니카,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