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752. 마마후후
보통 신년을 맞이하여 간지(띠) 차를 마시는 건 부러부러 기다렸다가 설에 올리곤 하는데 올해는 좀 당겨서 마셔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음력이 기준인 병오년은 아니기 때문에 말의 해라고 간지차를 마시는 게 영 적응이 안 되긴 한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는 차 호더라고 놀림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차를 쟁여둔 25년을 지나 26년에는 차를 좀 빨리 마셔서 정리하자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자리를 크게 차지하는 한정 틴부터 얼른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말의 해를 맞아 루피시아에서 출시한 간지차를 작년에 진즉 구매했다. 간지차는 작년에도 봉입을 따로 팔지 않아 한정 캔을 두 개씩 사야 하는, 가격도 곤란하고 캔이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곤란함도 겪어야 해서 딱 한철에만 구할 수 있다는 압박감이 꽤나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아무튼 50g 한정 캔이 1500엔으로 상미기한은 2년이지만 까자마자 1주일 안에 마셔보도록 하겠다.
작년까진 특별한 캔의 경우 토파즈 캔으로 나왔던 것 같은데 이번엔 아주 금색으로 발매가 되었다. 순금일 리는 없고 도금을 했을 리도 없고 색만 금색일 텐데 뭐랄까 너무 좀 노란빛이라 오히려 기존 토파즈가 좀 더 고급져 보이는 기분이다. 일러스트도 애매한 느낌이라 듣기로는 이번엔 간지차 구매를 안 하신 분들도 꽤나 계신 듯.
기모치가 하즈무 베리-노 카오리노 코차. 에가오 아후레루 이치넨오 네갓테 닌진노 톳핑구데 아소비고코로오 쿠와에마시타.
마음이 들뜨는 베리 향의 홍차. 웃음이 넘치는 한 해를 바라며 당근의 토핑으로 재밌는 마음을 더했습니다.
중국어에 마마후후라고 말말호랑이호랑이라는 말이 있는데 대충대충이란 뜻이라고 한다. 중국어 하시는 분들은 마마후후라는 발음을 보자마자 중국어에서 따온 건가 보다 하고 바로 알아차리시던데 루피시아의 작명 스타일로 보았을 때 맞는 말인 것 같다. 게다가 홈페이지에도 이 차를 소개하면서 힘을 빼고 웃음 가득한 한 해를 보내자는 의미라는 말이 있던데 그런 걸로 봐선 그쪽의 말장난이 확실한 듯. 당근 토핑을 올린 홍차라고 하니 철저히 개그를 노린 블렌딩과 이름이 맞는 것 같다.
봉투를 열면 익숙한 루피시아 스타일의 베리 가향이 팟하고 올라온다. 휘발성의 가향을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에 맡아보는 듯. 무슨 베리라고 말하기 어려운 달달한 레드베리 느낌의 가향이 꽤나 클래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휘발성의 쏘는 느낌을 제외하면 가향 자체는 꽤 뭉툭해서 두루뭉술하게 베리 향이라고 느껴지는 빈티지 느낌. 가장 기대가 되는 건엽의 모양을 보기 위해 덜어내어 보니 붉은 장미 꽃잎에 은박으로 코팅된 아라레들과 함께 사각의 당근 칩들이 함께 토핑되어 있다. 근래에 나온 루피시아 블렌딩 중 가장 도발적인 토핑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살짝 기묘하단 느낌이 들 정도. 특이하다 싶어 원재료를 살펴보면 몇 가지 더 재미있는 게 있다. 베이스로 쓰인 홍차는 인도 홍차에 일본 홍차가 블렌딩이 되었다고 하는데 건엽을 살펴봐도 일본 홍차를 알아보기는 좀 힘들고 대신 줄기가 꽤 섞인 듯이 보인다. 거기에 광택제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아라레의 은박 코팅이 별도로 적힌 걸로 봐선 어디에 쓰인 건지 잘 모르겠다.
정석대로 6g의 찻잎을 예열된 팟에 넣고 끓는 물을 부어 2.5분 우려낸다. 은박의 아라레가 녹아나는 느낌이 별로 없어 기대했던 반짝이는 찻물은 아니게 되었지만 코팅이 남아있어서 팟이나 스트레이너 등에 붙지 않는 것은 꽤나 쾌적하다. 당근의 향 같은 건 딱히 느껴지지 않고 평범한 루피시아의 베리 가향 차. 무슨 차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냥 술술 넘어가는 베리 가향 차라서 딱히 어떤 감상을 적기가 애매할 정도다. 다만 부드러움만은 특출난 것 같아서 아주 진하게 우려서 급랭을 해도 거친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부들부들한 느낌이 유지된다. 힘 빼고 하하하 웃으라는 취지의 차라고 했는데 그런 종류의 편안함으로 납득이 되는 블렌딩. 크게 특징이 없다 보니 곁들이는 간식도 뭐가 오든 무난한 느낌이다. 오히려 너무 편하게 벌컥벌컥 마시게 된다는 점에선 다식을 곁들여 속도 조절을 한다는 개념이 더 어울리겠다.
마마후후의 진정한 반전은 다 마시고 난 뒤 엽저에 있다. 물을 머금고 선명하게 살아난 주황색 당근 칩, 그리고 물이 빠져 흐물흐물해진 로즈 레드가 검은 찻잎 뭉치 위에 섞여 있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 마치 짜파게티를 다 먹고 바닥에 남은 건더기 스프를 보는 느낌이랄까. 로즈 레드가 양배추 역할을, 당근 칩이 당근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묘하게 킹받는 비주얼을 완성한다. 마마후후후후후후 하고 웃게 되는 뭔가 좀 뭔가스러운 느낌. 근래에 나왔던 간지차들 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호불호 없을 맛이지만, 엽저에서만큼은 확실한 인상을 남겨준 차. 말밥이 들어간 말의 차, 마마후후,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