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5670. 메론팡
그랑마르쉐 한정차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메론팡을 떠올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검증된 인기 맛도리 차. 사실 구입은 작년 2월 온라인 그랑마르쉐 때 진즉에 해두었는데, 이래저래 미루다 보니 이제야 시음기를 적게 되었다. 이미 우유 냉침으로 유명한 차이다 보니 본격 밀크티 시즌인 쌀쌀한 계절에 마셔야 할지, 아니면 시원한 게 어울리는 따뜻한 계절에 마셔야 할지 고민하다가 딱 맞는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개봉이 계속 미뤄졌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늦게 시음기를 쓰게 된 건 밀려 있는 시음기가 많아 한 봉지를 마시고 좀 기다렸다가 새 봉지를 비우게 된 탓도 있다. 여전히 많이 밀려 있어서 의미 없는 일이 되었지만. 50g 봉입으로 750엔이지만 680엔으로 두 개 구입했다. 이벤트 상품이라 할인은 아닐 테고 아마 여름에 가격이 인상된 듯. 상미기한은 2년이다.
너무 잘 팔릴까 봐 레귤러가 아닌 걸까. 아니면 희소성을 부여해서 심리적으로 더 맛있게 느껴지라고 이러는 걸까.
나츠카시이 아지와이노 메론판노 카오리오 이메-지시타 코-차. 미루쿠오 쿠와에루토요리 잇소아마사토 코쿠가 타노시메마스.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맛의 메론빵 향을 이미지로 한 홍차. 우유를 더하면 한층 더 달콤함과 깊은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일본에선 메론빵이 추억의 맛이구나. 이렇게 또 루피시아로 일본을 배운다. 이게 맞나 싶긴 한데. 밀크티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게 알려져 있으니 그렇고, 깊은 맛이 더 살아난다니 그건 또 신기하다. 보통은 강한 바디감을 적절하게 중화시켜 주지 않나. 일단은 마셔 봐야 알겠지.
봉투를 열면 루피시아 가향 특유의 찌를 듯한 날카로움은 없고, 대신 설탕과 버터로 밀가루가 구워진 듯한 구움 과자의 향이 부드럽게 올라온다. 쿠키스러운 향 뒤에 숨었다고 해야 하나 잘 가려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메론빵이라기보다는 메론쿠키 같은 느낌. 어찌 보면 마롱 계열의 과자 향 같기도 한데, 트릭 오어 티를 비롯한 쿠키 가향 차들 중에 이런 마롱 계열 뉘앙스가 꽤 있어서 비슷하게 연상이 되는 듯하다. 아무래도 과자 향이 메인이다 보니 결이 비슷하다. 건엽을 덜어내어 보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CTC들과 잘게 잘라진 홍차 잎들이 보인다. 원산지가 베트남, 케냐, 인도인 걸로 보아 가향 블렌딩에 편하게 쓸 수 있는 차들로 구성한 듯. 노란 아라레들이 메론빵의 소보루 같기도 하고 투명한 녹색의 금평당들이 함께 어우러져 메론빵의 색감을 떠올리게 한다. 에센셜한 색 두 개를 잘 뽑아 두었네.
우선은 스트레이트로 우려본다. 6g의 찻잎을 300ml의 물 100도에서 2.5분 우려낸다. 스트레이트만을 위한다면 2분으로도 충분하겠는데 뒤에 우유를 조금 넣어볼 생각. 이건 여러 가지 해보고 알게 되었지만 자잘한 찻잎들에 비해 그리 거칠거나 강하지 않아서 시간에 그리 민감하지 않아도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셔보면 멜론 과육의 뾰족한 산미가 살짝 스쳐 지나가면서, 설탕이 코팅된 소보로 같은 크럼블의 고소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향에서 오는 달달함이 이미 귀염뽀짝한데, 여기에 우유를 조금 부어주면 그야말로 사랑스러움이 추가된다. 베이스 홍차는 의도적으로 밋밋하게 만들어졌는지 떫거나 묵직한 어른의 맛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 메론팡이라는 블렌딩의 정체성에 더 잘 들어맞는다. 우유를 넣는다고 실키한 부드러움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트레이트에서의 느낌이 고스란히 우유에 전이된다. 그렇다고 묽어지는 것도 아니고 버퍼링되듯 버텨주는 느낌도 신기하다. 우유 냉침 추천이 많은 차인데, 개인적으로는 진하게 우려낸 급랭 아이스티에 우유를 살짝 넣어주는 것이 더 좋았다. 우유 냉침은 아무래도 홍차가 우러나는 데 한계가 있어 향 손실이 좀 있는 편이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좀 더 풍성한 향으로 마시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볼이 빵빵해지도록 귀여운 향을 가득 우려내어서 차갑게 식힌 뒤에 사랑스러움을 조금 더 부어주면 완성. 보통은 10g 이상의 찻잎을 300ml의 끓는 물을 부어 우려내고 얼음 가득한 컵에 따라내어 차가운 우유를 취향껏 부어 마신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얼음에 우유를 부어 먹는다는 게 아무래도 어색하다. 우유가 너무 묽어지는 기분이랄까. 우유에 얼음을 넣는다는 느낌이 아니고 얼음물에 우유를 살짝 추가하는 기분이 든다. 아니 그럼 아이스 라떼 같은 차가운 유제품 들어간 음료는 어떻게 먹냐고 할진 모르겠는데 시중에서 파는 음료들은 워낙에 설탕이니 파우더를 진하게 녹여 놔서 그런지 얼음으로 농도를 낮춰도 진하게 느껴진다. 뭐 길게 말할 거 없이 그냥 옛날 사람이라 적응을 못하는 듯. 그래서 아이스 밀크티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서 먹는 경우가 흔하지가 않다. 집에서는 보통 다른 거 넣지 않고 차에 우유만 넣어서 마시는 편이기 때문이다, 로얄이든 영국식이든. 그럼에도 메론팡 같은 차를 만나면 기존의 거부감 같은 건 잊고 얼음컵에 부어라 마셔라 하게 된다. 내가 어떤 선입견을 갖기 전에 메론팡을 먼저 만났더라면 큰 거부감이 없었을까. 전에 언젠가 이야기한 것처럼 루피시아의 차들을 마시다 보면 내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나에게는 없을 어린 시절의 향수가 마치 내 것인 양 떠오르곤 한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향수가 아니라 내가 어린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가 어린이가 되어버리는 기분인 것도 같다. 동심으로 둥실 되돌아가서 볼이 빵빵하도록 귀여움을 다시 머금게 되는 맛, 메론팡,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