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8587. 천리마
2026년 병오년, 말의 해를 맞아 루피시아에서 출시한 간지차 천리마. 천리를 달리는 명마처럼 새해에는 모든 일이 뜻대로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앞서 시음기를 작성한 마마후후와 함께 2026년 말의 해를 기념하는 차로, 마마후후가 홍차 베이스라면 이쪽은 녹차 베이스로 짝이 되는 블렌딩이다. 그렇다. 마마후후를 개봉했던 1월 초에 함께 개봉했고 지금은 이미 다 마신 차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사진은 남겨두었기에 무리 없이 시음기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50g 한정 디자인 금색 캔 1500엔으로 두 캔을 구입했고 상미기한은 제조일로부터 1년으로 좀 짧은 편이다. 캔 없이 봉입을 따로 안 팔아서 깡통값을 두 번 내야 하다니 너무도 큰 손해다.
금박의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에서 녹색 말이 힘차게 달리는 일러스트. 녹차 베이스의 블렌딩이다 보니 녹색으로 표현되었지만 이름도 그렇고 달리는 모습이 삼국지에나 나올 법한 명마의 느낌이다. 다그닥다그닥.
칸키츠토 킨모쿠세이노 미즈미즈시이 카오리가 초-와스루, 사와야카나 료쿠차. 치카라즈요쿠 카케루 우마노 요우니 히야쿠노 이치넨니.
감귤과 금목서의 싱그러운 향이 조화를 이루는 상쾌한 녹차. 힘차게 달리는 말처럼, 비약의 한 해의.
작년에도 녹차는 금목서 블렌딩의 센차이더니 올해도 센차에 금목서 블렌딩이다. 작년 에미의 경우엔 은박 코팅이 된 아라레가 들어가서 구수하고 은은한 둥굴레차마냥 편안한 느낌을 주는 차였다면 올해는 시트러스가 담뿍 들어간 블렌딩인가 보다. 라벨엔 나오지 않았으나 홈페이지 설명에는 국산 레몬그라스를 사용했다고 나온 걸 보면 강한 시트러스의 느낌이지 않을까.
봉투를 열어 향을 맡아보면 가향이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 훨씬 허벌 인퓨전에 가까운 느낌이다. 레몬그라스와 드라이한 오렌지필 같은 마른 껍질 향이 지배적이고, 그 위로 금목서의 향이 살짝 얹혀 있다. 시트러스 가향이 살짝 느껴질 때쯤 약간은 오렌지 주스 같은, 혈당이 차오르는 듯한 달콤한 향도 느껴진다. 건엽을 덜어내어 보면 확실히 녹차의 비중이 반을 넘지 못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레몬그라스와 오렌지필이 토핑의 수준은 진즉에 넘어선 꽤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간간이 보이는 금목서가 오렌지필이 부서져서 떨어져 나간 부스러기 같단 착각이 들 정도. 그러고 보면 센차가 아니라 덖음차 같은 녹차가 들어있는데 이렇게 되면 베이스가 훨씬 물질감 적게 블렌딩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스트레이트로 6g의 찻잎을 100°C 의 물에 1.5분 우려내어 탕향을 맡아보면 좀 구수한 것이 육수 같은 느낌이 든다. 녹차에 레몬그라스와 금목서가 들어가니 정말 무슨 탕 같은 인상이 되었다. 레몬향이나 오렌지필 같은 드라이한 시트러스 느낌이 워낙 지배적이다 보니 시큼한 탕국 느낌이 날까 걱정이 되었는데 탕향 자체는 구수하고 부들한 인상이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한 모금 마셔보면 시트러스가 뭉툭한 느낌으로 한입 가득 느껴진다. 베이스의 녹차와 금목서가 그리 존재감이 도드라지는 건 아닌데, 그러다 보니 약간의 들큰한 느낌과 함께 비릿느끼하다는 인상도 좀 있다. 아무래도 육수 같은 인상과 일맥상통하여 굳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시트러스의 깔끔함이 지배적이다 보니 레몬그라스로 모든 게 씻겨지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자주 마신 건 급랭 아이스티로, 아이스에서는 확실히 육수의 느낌이 줄어들고 베이스의 녹차 컨트라스트가 살아나면서 느끼하거나 밍밍한 인상에서 벗어난다. 금목서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단맛을 내주면서 튀어나가는 시트러스나 가라앉는 녹차의 맛을 중간에서 다 잡아당겨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핫티로 마실 때의 탕 같은 인상이 조금 걸렸는데, 차갑게 마시니 레몬그라스의 청량함이 돋보이면서 훨씬 깔끔하고 상쾌해진다. 자몽의 뉘앙스는 훨씬 더 깔끔하게 도드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금목서가 들어가는 블렌딩임에도 청량하고 상쾌한 느낌이 주가 되는 재미있는 차. 천리를 달려나가는 말처럼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레몬과 오렌지 같은 시트러스 껍질의 밝은 향으로 올 한 해도 쭉쭉 달려나가는 호쾌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천리마가 무슨 비행기처럼 천리를 한 시간 안에 주파하는 그런 느낌은 아니다. 다른 말과 비교해서 더 빠르다는 이미지도 분명히 있지만 천리라는 장거리를 달린다는 그 지구력과 활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단거리에 능한 치타 같은 움직임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좀 더 크고 긴 호흡으로 천리를 달려나가는 한 해를 꿈꾸는 게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올 한 해를 끝까지 달리게 만들어 줄 올해의 간지차 천리마,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