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거래처 사장님 어머님이 만드신 비매품 태평후괴
숨 가쁘게 달려온 루피시아 시리즈를 잠시 멈추고 한 달간 마셨던 또 다른 차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
어느 날 친구가 대뜸 차를 하나 선물해 줬다. 내 브런치를 보면서 집에 묵히고 있던 선물 받은 차를 주인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 친구는 중국에서 유학을 한 친구로 부부가 나란히 중국 유학생 출신이다. 게다가 중국무역에 관련된 일을 오래 해와서 아무래도 중국친구들이 좀 있는 모양. 친구(공식적으론 거래처 사장님)가 매년 이렇게 차를 가져다주는데 어머니께서 차 만드는 일을 하신다고 한다. 집에 널려있는 거 포장지 사다가 자기 회사 로고 박아서 선물로 준거라고. 오 대박. 앞으로 차 좀 얻어먹을 수 있겠군, 하면서 룰루룰루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근데 한자가 왠지 낯설지가 않다. 태. 평. 뭐. 뭐. 태평??? 진짜? 태평후괴???
태평후괴는 안휘성 황산부근의 태평호수 근처에서 만들어지는 차로 원숭이를 훈련시켜 찻잎을 잘 땄다고 하여 원숭이 후, 으뜸 괴를 붙여 이름을 지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있는 차로 중국 명차 탑텐 뽑으라고 하면 빠지지 않는 차 중에 하나이다. 일단 안휘성이 어디인가. 기문홍차의 고장이 바로 안휘성이고 그때 빠지지 않고 함께 언급되는 것이 황산모봉이라는 녹차이다. 황산모봉이 나는 바로 그 황산자락이 태평호와 만나는 곳에서 바로 이 전설의 원숭이 차가 생산된다. 옛날에 책에서만 본 걸 기억하고 있었는데 와... 친구네 엄마가 태평후괴를 만드신다고? 집에 가서 냉장고 열어보니까 트러플 버섯이랑 캐비어가 가득 차서 참이슬 넣을 칸이 없길래 좀 꺼내서 가져와봤어 뭐 이런 건가.
솔직히 믿기지가 않아서 이거 어떤 차인지 검색을 해보려고 세 시간을 뒤져보았으나 아무리 뒤져도 나오질 않고 중국어도 전혀 할 줄 모르고 문자인식도 잘 안되고 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론은 진짜루 그냥 집에서 만든 것. 캔에 보면 전승경전, 춘의영동, 원산다향 따위의 알 수 없는 말들이 써있는데 검색을 해도 뭐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두 시간을 넘게 검색해서 겨우 알아낸 게 저 캔 자체가 그냥 번들로 주문제작하는 차 포장용 캔. 방금 말한 문구들은 다 포장용기에 그럴싸하게 적혀있을 뿐이었고 딱히 차와 관련된 문구는 아니었다. 친구가 봄차라고 들었어하면서 주길래 춘의영동이란 게 봄차 이야기 하는 건가보다 했는데 그냥 장식용 문구. 그런 포장용 캔에 선물 주신 분이 대충 그럴싸해 보이게 태평후괴 프린팅도 좀 더 해놓고 뒷면에 자기 회사 로고와 주소 크게 박아서 기념품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세 시간 삽질이 허망하다. 그렇게 상품의 정확한 정보는 하나도 없는 상태인데 열어서 만져보고 마셔본 내용물이 이거 보통은 아니란 말이지. 진짜 정체가 뭐냐고.
개봉해서 덜어보면 저렇게 아스파라거스 눌러놓은 모양의 미역 같기도 하고 시래기 같기도 한 길쭉한 건엽이 나오는데 저게 바로 태평후괴 특유의 첨형(뾰족한 모양)이다. 잎 하나하나를 저렇게 길게 말아서 롤러등에 눌러 만드는 수공예. 보통 5~10센치 사이로 길쭉해서 작은 다관이나 개완등에서는 우리기가 쉽지 않은 차이다. 꽤나 충격적인 비주얼이기 때문에 더더욱 잊기 힘든 태평후괴. 100g 이상이 들어있었던 거 같은데 보급형 제품이라면 중국에서는 아마 60위안, 한화로는 11000원 정도 될 것 같다. 물론 고급으로 가면 더더더 비싸질 테고. 잎이 길쭉하니 작지 않은데 어떻게 저걸 덖어서 말아서 눌러서 불에 굽듯이 말려서 모양 그대로 포장을 하는지 정말 신비로울뿐이다. 그리고 얼핏 봐도 꽤나 상급으로 보이는데 건엽의 향이 말도 못 하게 향기롭다.
태평후괴 하면 빠지지 않는 사진이 바로 이 압도적인 비주얼. 첨형의 모양을 살려서 우리기 위해 보통 이렇게 긴 유리컵등에 차를 우리 곤 한다. 이 사진을 위해 다이소에서 사 온 긴 투명컵. 차 길이를 넘어가는 투명컵이 집에 있던 게 너무 맥주컵인 데다 로고 막 붙어있고 영 그래서 하나 장만. 근데 손잡이도 없고 귀찮아서 잘 안 쓰게 될 것 같다. 편한 다구를 써서 마시는 게 좋겠지만 작은 다완이나 개완에서는 건엽이 상하지 않게 우릴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한 번쯤은 안 해볼 수 없는 해초샷이다. 우리 집엔 사이즈 되는 팟이 있으니 앞으론 편하게 먹는 걸로.
6g, 300ml, 75도 같은 80도에서 1분, 30초, 1분 30초, 2분 순서로 우려냈다. 수색은 아주아주 맑고 투명한 노란빛에 가까운 녹색이다. 한 모금 마셔보면 와, 달다. 감로차(이슬차)보다는 덜하지만 정말 못지않게 달다. 그 단맛 뒤로 아주 은은하게 살랑살랑 가볍지만 아주 단정한, 그야말로 청아하고 청초한 향이 지나간다. 너는 수렴성이란 게 없니? 싶어서 온도를 80도 이상으로 올려보면 덖음 녹차 특유의 고소한 감칠맛이 진하게 우러난다. 모양을 특이하게 잡아둔 덕인지 4포쯤 되어서야 엽저가 활짝 펼쳐지기 시작한다. 물론 4포째부터는 맛과 향이 옅어지긴 하지만 5, 6포까지 거뜬하다. 뒤로 갈수록 여리고 섬세하기 때문에 물이 아주 중요해진다. 최대한 미네랄등이 배제된 이를테면 삼다수라던지 검증된 정수기 물을 사용하도록 하자. 서울 마포구 기준 아리수를 바로 사용하면 조금 물비린내가 난다.
우릴 때마다 동일한 맛과 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태평후괴도 일반적인 차와 마찬가지로 맛과 향의 상승과 하강을 겪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맑고 청아하다는 첫인상이 변하진 않는다. 단맛과 감칠맛이 빠져가는 게 극명하게 보여 아쉬웠을 뿐이다. 내포성이 좋긴 한데 뒤로 갈수록 초반의 맛이 그리워 새로 우리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그렇다고 또 서둘러 끝내긴 아깝다는 마음 사이에서 딜레마가 생길 지경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초지일관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묵묵히 은은한 난향과 푸릇한 향을 낸다. 여리고 섬세하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있다. 함부로 버리지 못하겠는 꺾이지 않는 기품이 있다. 이걸 어떻게 버려.
태평후괴는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길이가 길수록 평이 좋고 잎 중간중간 붉은 부분이 섞여있는 홍사선이 있는 게 좋다고 한다. 마시고 버린 엽저를 보면 드문드문 홍사선이 보이던데 어째 사진에는 홍사선이 잘 눈에 띄진 않는다. 홍배(찻잎을 불에 굽는다고 생각하면 되려나)나 탄배를 좀 더 한 건지 아님 조명 탓인지 기분 탓인지 문헌상으로 알던 엽저 색보다는 조금 더 칙칙한 녹색이긴 하지만 아직도 내포성이 살아있을 것 같은 비주얼이다. 너무 옛날 기억이지만 태평차는 열 번도 우린다고 들었던 것도 같고. 길이를 봐도 대부분 10센치를 넘기는 길쭉한 애들로 정가가 얼마인진 모르겠으나 확실히 접대용으로 고급차를 넣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친구는 뭐 이렇게 생긴 게 있냐며 대충 끓는 물에 우겨넣고 어 깔끔하고 좀 밍밍하네 하면서 치웠다고 한다. 그 와중에 평냉처럼 아주 깔끔했다고 하니 차알못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남다른 클래스가 있달까. 어쨌든 흔치 않은 인연으로 무려 비매품으로 만날 수 있었던 친친엄 태평후괴였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