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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Dec 16. 2023

숨바꼭질보단 우당탕탕 가면무도회 같은

루피시아 5522. 카슈카슈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정 일러스트가 나오곤 하는 루피시아의 일명 크리스마스 시즌티 중에 아직 마셔보지 못했던 차 시리즈 마지막, 바로 카슈카슈이다. 초면 이긴 하지만 워낙 예전부터 많이 눈팅했던 차라서 나름 내적 친밀감도 있는데 어째 자꾸 구매가 망설여져서 만날 기회는 없다가 이번에 작정하고 구매했다. 50g 한정 일러 캔입이 1060엔, 일반 캔입 1010엔, 봉입은 680엔이다. 상미기한은 2년.

관객이 참여한 음악회라는 컨셉의 일러스트

매년 일러스트 아이디어 내는 것도 큰 일이겠구나 느끼는데 루피시아는 디자인팀에서도 한정 일러 전담팀이 있을 것만 같다. 아무튼 제품설명.

카슈카슈 와 후란스고 데 가쿠렌보 노 코토. 이로이로 나 카오리 가 미에가쿠레 스루 큐-또 나 코챠.
카슈카슈는 프랑스어로 가쿠렌보(숨바꼭질)를 의미합니다. 이런저런 향이 보일랑말랑 하는 큐-트한 홍차.

프랑스어 카슈카슈가 숨바꼭질이었구나. 여전히 의문인 루피시아의 불어집착. 크리스마스 시즌도 꼭 샹띠 노엘이라고 이름 붙이는 정도니까 나는 또 좀 더 근본적인 그들의 컴플렉스를 프로이트 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거지. 아무튼 블랜딩 정보는 히든이라고 한다. 그럼 일단 뜯어볼까.

아라잔을 올리면 핑크페퍼가 묻히고 핑크페퍼 건지면 아라잔 어디갔니

비밀스런 가향차의 개봉이다 보니 신경이 바짝 곤두서야겠다. 이것은 베리류의 향인가 아니면 약간 열대과일스럽기도 하다. 망고나 살구 쪽은 아니고 좀 더 멜론이나 파파야스러우면서 살짝 버찌스러운 카시스보단 새침한 향이 난다. 모르겠네 이거. 건엽을 덜어내 보면 아쌈씨티씨, 케냐 부스러기, 베트남잎에 토핑으로는 어렌지플라워, 초록별사탕, 금색아라잔, 핑크페퍼가 들어가 있다. 여러모로 의아한 게 핑크페퍼와 녹색금평당 외에는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금색의 아라잔이 건엽사이에서 빛나는 모습이 제법 크리스마스 트리 느낌이긴 하지만 계절한정까지 걸어놔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는 느낌이다. 물론 마셔보기 전이니 온전히 공감하긴 어렵겠지.

보일랑말랑 미에가쿠레한 홍차라서 마법사 미키마우스를 꺼내봤다. 크리스미스엔 판타지아.

5g,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렸다. 건엽에서보다 훨씬 부드러운 과일향이 천천히 퍼진다. 조금 낯간지러운 작명이라 생각했는데 굉장히 작게 속삭이는 차였고 귀 기울이듯 코를 바싹 대고 마시게 되는 차였구나. 향이 좀 미묘하게 이거다 찝어내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워낙 복합적인 향이 뭐 하나 튀지 않고 은은하게 녹아있다 보니 차와 함께 딱 붙어서 뭔지도 모르게 스르르 넘어가버린다. 숨바꼭질인데 술레가 숨어있는 친구를 찾는 게 아니고 니들 어차피 다 여기 있지? 하면서 방문을 걸어 잠그는 느낌이다. 크리스마스 호러! 가향은 그렇게 한없이 부드럽고 밋밋한데 베이스는 또 날카로운 면이 있다. 살짝 뾰족하다고 해야 하나. 까실까실한 느낌과도 조금 다르다. 수렴성이 팍 튀어 오르기 직전으로 간질간질하게 억눌려있는 느낌이고 풍미 자체가 좀 날카롭다. 아무래도 가향과의 상승작용이 있는 것 같은데 결과물인 독특한 풍미가 과연 뭐랑 잘 어울릴지 도저히 모르겠다. 차분하게 혀끝을 좀 더 놀려보면 이상하게 에프리콧 느낌이 물씬 난다. 아무래도 약간 무거운 지점에서 과일향과 산미가 퍼져나가고 그 위에서 굉장히 큰 볼륨으로 수렴성 강한 크림티에서 나는 풍미가 적은 수렴성으로 지나가서 그런 식으로 느껴지는 듯. 건엽에서, 엽저에서 느껴지는 향과는 사뭇 다른 향이다. 의외로 케냐 잎의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침출 횟수는 그냥 1회만 하는 걸 추천하는데 재탕에서 맛도 향도 밋밋해져 버린다. 관객 콘서트라더니.. 앵콜요청금지!

뭐라고 나와있진 않지만 대놓고 과일가향이기 때문에 아이스티로 가보았다. 6g, 150ml 뜨거운 물에서 2.5분 우리고 얼음 콸콸. 급랭의 경우 진한 색감의 잘 모르는 색으로 맛과 향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속삭이는 타입의 차라 급랭보단 냉침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6g, 400ml 찬물로 냉장고에서 다섯 시간쯤 냉침하고 마셔보았더니 이건 의외로 잘 어울린다. 거친 파도 같던 티베이스도 차분히 정리되어 비로소 밸런스가 맞는 느낌이다. 어쩌면 핫티보다도 더 매력이 있을지도. 핫티와 급랭이 비슷한 결이고 냉침은 좀 더 비단결 같다.

오렌지 플라워가 연필 깎고난 연필밥처럼 보이기도 하네

사전정보가 별로 없는데 입안에서도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다 보니 숨바꼭질보다는 가면무도회에 가까운 느낌이 있다. 미션임파서블이나 007 같은 첩보물의 아슬아슬한 가면무도회는 아니고 정체를 알아도 그게 누구신데요? 할 것 같은 그야말로 도시의 가면무도회가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관객이 참여하는 컨셉의 일러스트가 어쩐지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이름 모를 관객들이 잔뜩 올라와 춤을 추는 그림으로 보이는 효과. 달큰포근한 느낌으로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마시기에는 나쁘지 않은데 매년 한정 일러스트까지 나오는 차이다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대해 지지 않는 것이 카슈카슈가 지닌 딜레마인 것 같다. 뭐 한편으론 우당탕탕한 느낌이 친숙하고 나쁘진 않네. 우당탕탕 가면무도회 같은 카슈카슈,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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