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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Dec 20. 2023

크리스마스에 재회한 나의 소중한 옛 친구

루피시아 5510. 크리스마스 리스

이번엔 너무도 크리스마스 시즌티인데 어쩐지 크리스마스 옷은 입혀주지 않는 크리스마스 리스를 마셔본다. 홈페이지 제품 설명에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티 어쩌구 써있는데 뭔가 그 옛날 잭슨스나 포트넘 크리스마스티 생각하고 마셨다가 실망할까 봐 주저하며 마셔보지 못했던 차였는데 고민 십여 년 만에 마셔보는 듯하다. 언듯 르피시에 시절에도 살까 말까 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20년에 가까운 십여 년인 듯… 그리고 이 시음기가 끝날 때쯤 나는 그 긴 세월을 후회하려고 한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50g 봉입 600엔, 상미 2년인 이 차를 마셔보자. 가격도 착하지.

쿠리수마수 리이수

크리스마스 리스는 이름부터 참 크리스마스라서 설명도 간단한 것 같다.

아푸루 또 시나몬 가 카오리타츠 요로파 덴토 노 쿠리수마수티. 미루쿠 오 쿠와에떼 모.
사과와 시나몬이 향기로운 유럽 전통의 크리스마스 티. 우유를 넣는 것도.

사과와 시나몬의 조합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그 애플잼, 애플파이의 느낌이 있을 것이고 유럽 전통의 크리스마스 티라면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담백하고 직관적인 작명과 설명. 루피시아에서 흔치 않은 일이고 특히나 이 시즌에는 뜬구름 잡는 작명과 이름이 많은 거 같아서 굉장히 반갑다. 그리고 평범한 홍차 레시피라서 헷갈릴 일도 없겠다. 늘 마시던 대로.

하루견과 아닙니다

개봉향은 달달한 스파이시라고 할 수 있겠다. 기대했던 애플파이의 달짝 씁쓸한 향보다는 장작 묵은내 같이 조금은 중국스러운 향신료가 더해져 살짝 짜이티의 기분도 난다. 어딘가 그리운 향이 나는 거 맞네 아주 확실하네. 눈물이 찔끔 날뻔했다. 이게 어떤 향인지 정체는 나중에 마시면서 얄랴줌. 건엽을 덜어내면 카다멈과 말린 사과조각, 시나몬조각, 아마도 말린 베리종류가 토핑 된 아쌈 씨티씨와 베트남 홍차가 나온다. 사진에서 보시듯 토핑이 굉장히 풍성하게 들었다. 비주얼은 거의 짜이 재료급. 밀크티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힘 좀 줘봤다 찻자리

6g, 300ml, 100도의 물에서 2.5분 우려내었다. 수색은 아주 평범한 홍차의 색으로 특별할 게 없는데 시나몬과 카다멈의 향이 정말 진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폭발한다. 시나몬, 카다멈 향이 왜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이어지냐면 또 라떼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암튼 90년대 말~00년대 초기의 서양홍차에서 크리스마스티 라고 하면 대게 이쪽의 느낌이 나는 가향차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에 홍차 하면 이쪽의 향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잭슨스니 포트넘 이야기가 바로 그것. 추억을 떠올리며 한 모금 마셔보니 약간의 사과 산미가 느껴지는 텁텁하지 않은 시나몬의 향을 카다멈을 비롯한 여려 향신료가 매콤하게 지긋이 눌러준다. 앗! 이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내 친구를 발견한 강렬한 기분! 너 혹시 애플크럼블???

위타드 오브 첼시에는 애플크럼블이라는 홍차가 있었더랬다. 말 그대로 애플 크럼블이라는 디저트를 따온 가향차로 시나몬과 애플이 주가 되면서 정말 파운드케익 느낌으로 고소하고 부드러운 빵느낌이 나는 차였는데 언젠가 단종이 되었고 그게 벌써 20년 전인 거니? 아무튼 애플크럼블의 느낌이 난다. 빵 느낌은 조금 덜 하고 수정과 느낌이 한 스푼 더 들어갔나? 그래도 여태 먹어본 차들 중에 가장 애플크럼블에 가깝다.

그렇게 감동에 젖어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한 팟을 다 마셨는데 재탕에서는 진짜 계피향만 은은하게 나면서 수정과가 되어버려서 갑자기 흐린 눈이 됐다. 수렴성은 약한 편이고 가향은 시나몬과 정향 쪽으로 많이 강한 편이니 취향에 따라 주의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단전에서부터 있는대로 끌어올렸다

밀크티도 그냥 넘어갈 수 없지. 6g을 팬에 달달 볶다가 물 찔끔 넣고 자글자글 끓여서 우유 250ml를 넣고 따끈하게 데워낸다. 물이 조금 적었는지 색이 진하게 나오질 않았는데 토핑이 많아서 찻잎이 좀 적었을지도. 팬에 볶아낸 거라 향은 진하디 진하다. 역시 뱅쇼보단 짜이를 더 좋아한다. 짜이에 가까운 밀크티가 부드러우면서도 알싸하게 몸을 덥혀준다. 크리스마스 리스는 시나몬, 카다멈, 정향 등의 콜라보로 어지간한 베이커리류와 다 잘 어울린다. 덤으로 열감이 있는 편이니 날이 추울수록 더 좋을 듯. 매콤함에 취해서 통후추를 좀 더 넣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베이스가 좀 더 거친 느낌이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부드럽기만 해서 차를 조금 더 넣어야 하나 싶은 맘이 들었다는 점? 로얄밀크티보다는 영국식으로 아주 진하게 우린 차에 우유를 살짝 넣는 편이 더 나았다. 12g, 300ml, 100도 물에서 3.5 분하고 밀크폼을 살짝 올려줬을 때 가장 내 취향이긴 했다. 제가 좀 진하게 마시는 편입니다 참고.

알록달록 아름다운 엽저

엽저와 함께 보는 불린 카다멈, 노오랗게 드러난 사과조각, 붉은색으로 자기 색을 찾은 크랜베리가 아름답다. 건엽보다 더 아름다운 엽저. 씨티씨 비율이 조금 더 높았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점이 다시 한번 좀 아쉽다. 위타드에서 애플크럼블이 단종될 때 너무너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직구를 할 방법도 잘 몰랐고 홍차를 그렇게 패키지 단위로 턱턱 살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고 그래서 더 구하기 어려웠던 홍차들. 구할 수 있는 걸 마셔야 했던 시기가 지나고 내가 마시고 싶은 걸 구해서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미 단종되어 버린 차들도 많았고 그때마다 비슷한 대체품을 찾아 울며불며 헤매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구나. 왜 진즉에 애플 시나몬 조합이라고 나와있는 이걸 마실 생각을 못했던 걸까. 반가움과 후회가 교차하는 크리스마스 리스. 이름에 비해 제대로 크리스마스 티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아 또 서운하고 이것도 단종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앞으로 많이 많이 팔아줘서 무병장수하는 블랜드가 되도록 해야겠다.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크리스마스 스피릿을 느끼면서 시음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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