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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Dec 11. 2023

밤과 고구마와 호박의 시간

루피시아 9209. 이모쿠리카보차

사실 말이지, 이모쿠리카보챠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어. 바로... 다 마신 지가 1주일이 넘었다는 거야. 본격 추억을 더듬어보는 시음기 시작.


매년 가을이 되면 루피시아에서 뜨거운 인기를 구가하는 차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이모쿠리카보챠이다. 이름도 길고 특이한 이 차는 대놓고 가을 구황작물 이름 세 개를 붙여놓은 웃기는 차이기도 한데 하나같이 달달 구수한 향에 반해서 정신들을 못 차리고 몇 봉씩 사모으시는 후기들을 꽤 봤어서 나도 언젠가는 마셔봐야겠다 생각하던 차였다. 이번 가을에는 열심히 정신 차리고 대기했던 덕분에 구매에 성공했다. 루피시아의 주력 계절은 가을겨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 것도 많은데 스피드도 중요하고. 아무튼 10월~1월 계절한정을 구매하는데 성공. 50g 봉입에 850엔으로 상미기한은 반년이다. 공홈에서 특별히 제조일로부터 반년이란 점을 또 강조하고 있다. 이런 건 잘 체크해둬야 한다. 열자마자 가향이 사라진다는 경고문과 마찬가지.

이모 쿠리 카보챠

이모쿠리카보챠라고 써있는데 진짜 차 차자를 써놨다. 카보챠가 호박인 건 알겠는데 카보라고 줄이기도 하는 건지 아님 언어유희 같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모는 감자 고구마 이런 알뿌리들을 말하는 거고 쿠리는 밤이니까 감자고구마 밤 호박 뭐 이런 이름이다. 가을 구황작물 대 모음 느낌.

쿠리 또 사츠마이모 노 호코리 아마쿠 야사시이 카오리 노 루이보스 니 키이로이 카보챠 오 토핑그
밤과 고구마의 따뜻하고 달콤하며 부드러운 향기의 루이보스에 노란색 호박을 토핑 한 차

고구마, 펌킨호박(애호박 아니고)을 토핑으로 잔뜩 넣은 마룬가향 루이보스인데 이제 호박에 이런저런 달달이와 고소한 걸 입혀놓은 본격 건강차인척 하는 루이보스. 햇볕에 말린 건 아니고 동결건조로 말린 토핑이라고 한다. 우림시간이 3~5분으로 꽤 긴 편이다. 루이보스가 원래 이렇게 오래 우리던가?

호박다진 알갱이가 잔뜩 들었다

루이보스의 향을 넘어서는 구수함. 루이보스와 밤, 고구마향이 섞이니까 초콜릿 같은 향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렇다. 고구마 토핑은 많이 들어있진 않고 호박토핑이 작고 많다. 루이보스는 좀 자잘한 편. 사진으로 보니 더 작아 보인다. 아무튼 호박이 정말 많이 들어있어서 호박차 느낌이 날 것 같다. 가향도 진하게 잘 들어있어서 밤이 전혀 안 들었는데 쿠리랑 가향 진하기는 거의 비슷하다. 향은 마룬이고 보이는 건 호박 다져놓은 건데 어차피 루이보스이겠지. 슬슬 인지부조화가 오려한다. 얼른 물을 끓이자.

찻자리를 따로 깔진 않았지만 아주 신경써서 만들었다구

6g, 300ml, 95도의 물에서 4분 우렸다. 나름 신경 써서 투명컵에 담았는데 찻자리 꾸밈이 크리스마스 시즌티들과 너무 차이가 난다. 살짝 미안해지는데 사실 3주도 넘게 한참 전에 마시기 시작해서 회사에서 거의 다 마셔서 사진을 다시 찍기가 어려웠다. 일단은 잎이 많이 잘아서 거름망을 하나 더 쓰는 게 좋겠다. 첫 모금에서 카멜리아 시넨시스가 들어간 '차'였다면 벌써 한약이 되었을 텐데 루이보스를 이렇게 진하게 우리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진하면서 부드러울 수가 있는 건가? 보통 이 정도의 농도라면 일말의 수렴성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루이보스는 원래 수렴성이 없다는 듯 아주아주 찌인하고 부드러운 맛이다. 입안을 좀 더 넓게 쓰면서 한 팟을 다 마실 때쯤 약간 느껴지는 수렴성. 차와는 별개의 수렴성으로 그냥 뜨거운 거 홀랑홀랑 마셔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진하고 진한 루이보스가 전면에 나서서 왜 밀크티 라벨이 붙어있는지를 몸소 증명하고 있을 때 마룬가향이 뒤에서 구수한 향을 뭉게구름처럼 뿌려댄다. 그러고 보니 찻물에서 군고구마인지 찐 고구마인지 모를 고구마향이 솔솔 나기도 하고. 입안을 넓게 사용하면 호박 우린 물 느낌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흠이라면 너무 부드러워서 보리차 마시듯 꿀떡꿀떡 마셔버린다는 점.




사진은 없지만 아무튼 밀크티도 마셔봐야겠지. 사실 짜이나 로얄밀크티가 아니고선 밀크티에 손이 잘 가진 않는데 올해 아내가 루이보스 밀크티를 마시고 맛이 나쁘지 않았다고 하길래 루이보스 밀크티도 종종 마셨다. 12g, 300ml, 5분을 100도의 물에서 우렸다. 진짜 커피처럼 진한 색으로 우러난 루이보스에 밀크폼을 100ml 좀 안되게 올려서 마신다. 라떼에도 샷추가를 두어 번 할 정도로 베이스가 진한 걸 좋아하는 편인데 베이스가 정말 진하고 고소했다. 물론 찻잎을 많이 넣기도 했고, 압니다 알아. 중요한 건 이렇게 진하게 해도 맛이 텁텁하다거나 쓰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모쿠리카보챠의 핵심은 부드러운 맛이 아닐까? 물론 가향이 파우더 녹인 밀크티처럼 살아나진 않는다. 가향이 연해지는 점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흐릿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다. 그런 점이 또 설명에 나와있는 것처럼 야사시이 한 부분인 것 같기도.

호박 다 어디갔니

짧은 상미기한에서도 알 수 있듯 개봉하고 나면 향이 빠르게 날아가는 편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신경 쓴다고 썼는데도 처음 마실 때와 마지막 봉지를 털어 마실 때의 향이 조금 차이가 있기도 했는데 처음 진했을 때의 초콜릿스러운 향이 좀 더 루이보스다워진 것 같아서 나쁘진 않았다. 그저 가향이 날아갔을 뿐일지도. 이번 장바구니에서 마룬 쪽의 최고 기대주는 따로 있기 때문에 조금 시들한 느낌일 수도 있지만 이모쿠리카보챠의 높은 인기가 어떤 매력에서 오는지를 알기에는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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