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8248. 토치오토메 ~딸기녹차~
도쿄에 갔을 때 마침 딸기철이라 마트에서 딸기를 한 팩 사서 숙소로 돌아왔는데 너무 바쁜 일정으로 이틀이 꼬박 지나고서야 이러다 버리겠다 싶어 아침에 급하게 딸기를 씻어서 먹어보았다. 옛날 한국 딸기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들이었던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제는 한국 자체 품종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져 더는 일본에 로열티를 내고 일본 품종을 키우는 농가가 없다시피 하다고 들었다. 한국 자체 품종도 너무 맛있어서 딸기는 역시 한국 딸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서양의 맛대가리 없는 딸기와 비교를 하다 보니 생긴 좁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날 숙소에서 허겁지겁 먹었던, 그래서 사진도 남기지 못한 딸기는 뒷맛에 새콤한 신맛도 없고 달달한 향이 그 진하기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사진이나 포장지를 남겨두지 못해서 어떤 딸기인지 너무 궁금했고 다시 만날 수는 있으려나 했는데 얼마 전에 그 마트에서 받았던 영수증을 발견해 품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딸기(도치오토메) 680엔'
루피시아에는 정말 수많은 딸기가향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걸 꼽으라면 단연 도치오토메 시리즈이다. 도치기현의 특산품인 이 딸기는 이름부터가 도치(토지라는 뜻이기도 하고 도치기현의 이름도 나타내고)의 소녀라는 뜻인데 그 딸기의 시즌에 맞춰 생딸기를 말린 뒤 각각 녹차와 홍차로 블랜딩 한 도치오토메 홍차 녹차는 매년 이것의 발매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인 블랜딩. 구매계획이 있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한정 일러스트틴은 품절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냥 평범한 봉입으로 구매했다. 이 참에 재활용도 안 할 틴케이스 좀 그만 사야지 다짐해 보지만 그 뒤로도 일러 캔을 몇 개 더 샀다는 소식. 50g 봉입에 850엔으로 일러캔 1200엔에 비해 저렴하게 잘 구입했나? 계절 한정으로 1월~5월 사이에 도치오토메 시즌에 맞춰 판매하는데 4월까진 그래도 넉넉히 구매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상미기한은 1년으로 들어가는 딸기를 생각하면 짧지는 않은 편.
당연히 일러캔을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봉지라서 시무룩. 그래도 이 차를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며 차분히 외국어를 번역해 본다.
슌노 이치고 토치오토메 노 텐넨 유라이 노 아마주파이 카오리 오 노세타, 사와야카 나 후우미 노 이치고 노 료쿠차 데스
계절의 딸기 '토치오토메'의 천연 유래 새콤달콤한 향을 얹은 상쾌한 맛의 딸기 녹차입니다.
제철딸기로 맛을 낸 녹차라는 뜻. 워낙 유명한 데다 위에서 이야기한 일들로 이미 사전 정보들은 충분했다. 1.5분~2분 우리는 걸로 레시피가 나와있지만 생각해 보니 다관에, 개완에 마시느라 서양차 마시듯 저렇게 한 번에 우리는 방식은 딱 한번 해봤을 뿐이다. 결론만 말하면 크게 차이 없었다. 편한 대로 마시면 되겠습니다.
봉지를 개봉하니 달달한 딸기향이 올라온다. 보통의 루피시아 딸기가향에서 나는 휘발성의 향은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아예 없진 않지만. 보조로 가향을 더 하긴 한 모양이다. 건엽을 덜어내 보니 센차가 큼직하게 잘 말려있다. 동결건조된 딸기도 그야말로 생물의 느낌. 뭔가 고오오오급의 느낌이라기보다는 제철음식의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보이기로는 미끈한 센차의 느낌인데 루피시아의 가향 녹차에서 그렇게까지 미끈한 센차를 마셔본 일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정도의 고급 센차가 연상되진 않는다. 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신선한 느낌은 팍팍 난달까.
4g, 150ml, 75도의 물에서 1분간 우려 본다. 약 5초 정도 가볍게 세차하고 우려냈는데 벌써부터 딸기향이 진하다. 우려내는 동안 세차한 물로 공도배와 잔을 뎁혔는데 그냥 진한 게 아니라 어디서 딸기우유향이 퐁퐁퐁 난다. 동결건조 딸기를 넣어줬는데 우유향이 날 거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다. 가향의 정체가 우유향이었나. 진득하게 우려낸 차에서는 반대로 딸기우유를 동결건조한 분말이 아닐까 싶은 향이 폴폴폴. 초록빛 투명한 딸기우유라니 너무도 상식에 반하는 감각의 불일치에 불쾌할 법도 한데 맛과 향이 너무 기부니 조크등여. 쟁여놓고 마셔도 좋을 맛과 향이다. 밀크티로도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이미 충분히 밀키 하지 않나 생각도 들어서 밀크티로는 마셔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부드럽고 연한 느낌의 차여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녹차가 뒤로 숨는 편인데 밀키 한 향 뒤로 우유의 고소한 맛과 유사하게 고소한 맛을 내면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듯하다. 하지만 약간의 반전으로 뒤끝 있는 수렴성을 보여주기도 하니 마냥 순하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80cc 개완으로 4g씩 연거푸 마시다 보면 하루에 서너 번 계속해서 마시게 되는 마법의 차인 도치오토메 녹차. 좁디좁은 도쿄의 호텔방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맛보았던 도치기의 딸기맛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분명 새로운 맛인데. 차를 어려서부터 마셔서인지 차를 마실 때 내가 느끼는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나 아련함 같은 것들이다. 심지어 딸기우유 같은 도치오토메를 마시면서도 학창 시절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 가서 딸기우유를 사 먹던 친구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렇게 아련함에 젖어 한참 동안 ditto를 들었다. 뉴진스는 정말 봄딸기 같다 생각하면서. 홍차왕자가 필요한 하루하루다. 차를 마시는 속도에 비해서 뭐라고 시음기를 적을 기운이 나질 않으니 나를 대변해 줄 마법 같은 무엇이 필요하다. 일단, 그쪽으로 GPT는 글러먹은 것 같다. 도치오토메 녹차는 이렇게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