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G 6110. WINTER PALACE TEA
일본 TWG 매장에서 있었던 특별한 홍차 추천 에피소드를 지난번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다시 간략히 소개하자면 내가 엄청 까탈을 부리면서 이것저것 엄청 시향을 했었다는 이야기되시겠다. 그렇게 구매한 차들이 어찌 보면 뻔하기도 한 리스트가 되었는데 이제 소개할 남아있는 차들은 한국에서 많이 보진 못했던 차들만 남아있어서 그 까탈의 결과물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까탈까탈하게 고른 차 중 하나인 winter palace, 겨울궁전이다. 엘사가 사는 궁전같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향도 굉장히 특이해서 바로 오케이 했던 차. 좀 더 추워지면 마셔야지 하면서 기다렸다가 이제 개봉했다. 50g 소분으로 1100엔.
눈 덮인 고원에 웅장하게 서있는 대리석 궁전 같은 이미지의 꿀과 아몬드향의 홍차라고 한다. 겨울궁전 이름 그대로 굉장히 겨울겨울한 향이라고 느꼈었는데 어딘가 고급지고 신비로우면서 어? 이거 아는 건데? 싶은 향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은 어떤 향일지 소분봉투를 열어본다. 뭔가 살짝 찌르는 냄새가 나는데 이게 뭘까. 이거 정말 아는 향인데. 며칠을 지나서야 깨달았다. 아 맞다, 이것은 내 목젖을 적셔주던 바로 그 프로폴리스의 향. 포레스트 허니라고 해서 그게 뭔가 했더니 아마도 야생꿀, 프로폴리스 느낌의 꿀인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뭔가 더 새콤한 향이 있는데 이게 뭘까 했더니 인공 체리향. 뜬금없이 체리향이 여기서 왜 나는 거지 싶은데 아마도 설산의 나무들 사이에서 빨간 열매가 눈송이 사이로 열려있는 이미지를 생각한 건가 싶다. 약간은 쌉싸름하면서 은은하게 단 향기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건엽을 덜어보니 메리골드와 밤 조각, 아몬드 조각등이 보인다. 오히려 일반적인 꿀향이 떠오르는 모습인데 체리 프로폴리스라니. 굉장히 색다르다.
6g의 차를 300ml의 100도씨 물에서 2.5분 우렸다. 우려낸 차에서는 프로폴리스의 향은 많이 사그라들고 오히려 체리향이 더 강해진다. 기분 탓이겠지만 수색도 살짝 붉은빛이 도는 기분. 절인 체리의 향이 폴폴 나는 게 어딘가 빙수 같은 얼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뜨거운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참 아이러니하다. 한 모금 마셔보면 실론이나 케냐등의 홍차에서 날법한 맛에 약간의 너티, 우디 함이 섞여서 윗부분의 체리향이 목넘김과 동시에 퐁, 하고 터지면 빠르게 그 흔적을 밀어내고 마치 산미 가득한 홍차처럼 공간을 채운다. 도대체 너트의 맛과 향은 어디 간 건가 싶은데 후운에서 슬며시 견과류의 고소함이 느껴진다. 어쨌거나 꿀향이 짙으니 밀크티를 한번 해볼까 싶다가도 체리향 우유를 생각하면 우유를 내려놓게 된다. 어쩌면 맛이.. 있을지도.
숲 속 꿀의 독특한 향으로 나를 홀렸던 겨울궁전. 겨울비를 맞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차갑고 신선한 나무향에 그 진액들을 한 방울씩 모아서 만든 것 같은 진한 꿀향이 체리처럼 상큼하고 달달하게 퐁퐁퐁 솟는 차였다. 아직도 체리향의 근원이 꿀인지 가향인지도 모르겠어서 방금 한 말이 맞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향 자체가 저 멀리까지 짙게 퍼질 정도로 강하고 워낙 독특한 향이라 호불호가 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취향을 떠나 굉장히 고급지게 완성된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마시다 보니 궁전보다는 핀란드의 어느 숲 속을 떠올리게 하는 겨울궁전, 끗.
+
눈이 엄청 오는 날 살짝 연하게 4g, 300ml로 우려서 마시면 분위기가 너무 좋다. 시야가 하얗게 날아갈 정도로 펑펑 눈이 오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2024년 11월 27일. 립파이 한 조각과 마셨던 윈터 팔라스가 최고의 맛이었다. 다만 한국의 특성상 이걸 상비하고 있다가 어쩌다 하루 이틀 있는 조건에 맞춰서 마시기가 쉽진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