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디 Tea Fantasy. 기문
칼디는 커피부터 각종 향신료까지 이것저것을 판매하는 가게로 갈 때마다 어쩐지 좀 설레는 곳이다. 음료계의 올영 같은 곳이랄까. 갈 때마다 새로운 제품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소량씩 이거 저거 담을 수가 있는데 자잘하게 장바구니에 넣고 넣고 넣다 보면 한 보따리 십몇만원 이런 식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올영 같은 곳. 당연히 차 종류도 많이 파는데 포숑이나 쟈넷 같은 메이저 한 회사의 차들이 많았었고 이번에 발견한 건 칼디 자체 상품으로 이게 뭐야 싶어 냉큼 담아와 봤다. 우선은 기문. 380엔으로 40g이고 상미는 제조 약 2년인 것 같다. 소량이고 저렴하고 지퍼백 스타일로 나온 점등 일단 외관만으로도 기분 좋고 든든하다.
저렴한 가격부터 봉투의 디자인까지 뭔가 90년대 위타드 틴의 갬성이 느껴지는데 위타드의 파란틴 시절 접했던 브로큰 리프의 기문이 떠오르는 여러 가지이다.
蘭の香りを思わせる芳醇な香りと渋みの少ないキーマンはストレートティーがお勧めです
난 노 카오리 오 오모와세루 호준 나 카오리 또 시부미 노 수쿠나이 키문 와 수트레또티 가 오스스메 데스
난초의 향을 연상시키는 풍부한 향과 떫지 않은 기문은 스트레이트 티로 즐기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뒷면에도 설명이 써있는데 인도와 스리랑카 등에서 엄선된 찻잎이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일괄 디자인인 것 같다. 아무튼 뒷면에 써있는 추천 레시피는 150ml, 3g, 3분이다. 요즘은 아무래도 150ml에 3g이 추세이긴 한 듯.
봉투를 열어보니 바싹 마른 홍차향이 먼저 난다. 건초스러운 향부터 나는 것이 완전 서양홍차 스타일이다. 점점 더 옛날 서양홍차 갬성에 맞아 들어간다. 조금 더 자세히 맡아보니 희미하게 중국홍차 향이 나는데 옅은 스모키 함이 깔려있다. 훈연향이라고 하기엔 강도나 결이 다른, 뭔가 배화향에 가까운 향인데 나는 이걸 정체를 배우기도 전에 중국홍차는 늘 이런 향이 나는군, 하고 배웠던 향이라 그냥 중국홍차향이라고 먼저 인식이 된다. 건엽을 살살 덜어내니 기문 특유의 향이 본격적으로 느껴진다. 정산소종류보다 조금 더 가볍고 산미가 있는 향이랄까. 찻잎은 너무 잘지 않은 브로큰이다. 아주 간간히 줄기도 섞여있는 게 서양홍차에 가까운 기문이 맞다. 최근에는 기문을 구하면 좀 더 중국차 스타일로 큼직하게 썰린 찻잎들을 많이 접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이런 스타일이 오랜만이라 반갑다.
고급 기문에서는 살짝 낮은 온도로 상투법 비슷하게 동양식으로 우려내면 난향이 진하게 난다고 한다. 제품 설명에서도 난향을 언급했었기에 개완으로 마셔본다. 4g, 65ml, 한 김 식힌 물로 30초 정도 우려 주었다. 슬며시 퍼져나가는 기문의 향. 한 모금 마셔보면 단맛과 함께 옅고 넓게 퍼지는 향이 느껴진다. 짙은 난향은 나질 않았다. 뭐 그 정도까지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게 살아있다. 역시 이 정도의 차품에선 조심스레 우리는 것보단 서양식으로 과감히 우리는 편이 더 맞겠다. 6g, 300ml의 100도씨 물, 2.5분. 이제서야 확실히 몸이 풀리는 기문이다. 제법 거칠게 다뤄줬는데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뒷맛이 정말 실키하다고 느껴지는 부드러움으로 찻물 안에 녹아있는 향은 농도가 그리 짙지는 않아서 마무리가 살짝 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싱겁거나 하진 않다. 꽉 찬 맛은 아니지만 충실한 기문이었다.
여러모로 파란틴 시절의 위타드를 생각나게 하는 칼디의 키문이었다. 이런 제품에선 역시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가격대비 충분한 차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블랜딩 없이 기문을 마셔보는 게 꽤나 오랜만인데 고급진 기문이 아닌 딱 흔한 기문의 맛과 향을 제대로 리마인드 시켜준 좋은 기회였다. 언젠가 내 찬장에 머물렀던 위타드의 파란 기문틴을 추억하며 칼디의 기문, 끗.